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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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달리타스의 걸림돌 ‘성직주의’… 예수님의 삶에서 답 찾아야

[특별대담] 시노달리타스와 성직주의, 성찰과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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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 내에서 ‘성직주의’, ‘성직자 중심주의’와 관련한 대화가 많이 이어졌다. 특히 근현대 폭발적 성장을 이룬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회자돼 온 주제이기도 하다.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성직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서로 경청하며 대화하고, 성령의 뜻에 맞게 식별하는 시노드를 통해 한국 교회의 성직주의를 돌아본다.

cpbc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시노달리타스, 성직주의 성찰과 나눔’을 주제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초청 대담을 마련해 한국 교회 내 성직주의의 현실을 짚어보고, 함께 나아가야 할 방안을 고찰했다. 허영민(의정부교구 신암리본당 주임) 신부, 이현숙(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초빙연구원 박문수(프란치스코) 박사가 패널로 참여했다.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가 사목자료 첫 시리즈로 발간한 「성직주의-성찰과 나눔」의 필자들이다. 대담 진행은 cpbc 보도주간 조승현 신부가 맡았다. 이들은 ‘성직주의’로 120분간 시노드를 했다.

정리=박민규 기자 mk@cpbc.co.kr



성직주의와 그 문제점 
사제 중심주의 사고와 문화
공동체에 분열 일으키기도 
교회의 훌륭한 자원 활용 막아 


시대적 변화, 어떻게 해야 할까 
수직적 질서가 수평적으로 
권위주의에서 탈피해야 할 때
겸손한 사제, 절제된 삶 필요 
예수님의 삶으로 돌아가야  



 
조승현 신부

조승현 신부(이하 조 신부) : 성직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이를 해소해 나갈 방안은 무엇인지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허영민 신부


허영민 신부(이하 허 신부) : 사제품을 받으면서 가장 많이 불리는 용어가 ‘목자’, ‘사람 낚는 어부’죠. 사람 낚는 어부,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성직주의는 이에 완전히 역행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낚시꾼이 고기도 잡히지 않는 곳에 낚싯바늘을 잘못 던지고 엉뚱한 소모전을 펼칠 수도 있고, 길 눈이 어두운 양을 우리로 데려 가야 하는데, 성직주의로 인해 눈이 가려져 수렁으로 빠뜨릴 위험도 커지죠. 성직주의의 위험을 공동체적, 개인적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는 분열을 일으키고, 신자들에겐 큰 상처를 줄 수 있죠. 그리고 마지막에 상처받는 사람은 성직자 자신입니다. 사실 성직자라면 제일 먼저 어떤 소박함, 절제된 삶, 이런 모습을 가져야 하는데 성직주의에 익숙해지는 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는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갖게 됩니다. 결국 사제가 목자로서 양들을 모아들이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흐트러뜨리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본당 신부가 부임했을 때 교우들이 쫙 모이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다 흩어져 마치 유목민 그리스도인을 연상케 하는, 여기저기 성당을 떠돌아다니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모습도 많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성직주의에 대한 사제들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현숙 수녀

이현숙 수녀(이하 이 수녀) : 성직주의는 교회 안에서 길게 시간을 가지고 쌓아온 문화잖아요. 세상은 너무 급속히 발달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미 사제, 수도자만으로는 세상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평신도에게 많은 권한을 줬죠. 왕직, 예언직, 사제직, 또 평신도가 지닌 신앙감각 등 교회가 많은 것을 열어놓았어요. 한국 교회 전체 분위기가 굉장히 수직적인 질서이고, 사제들도 그 문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성 과정에서 수녀가 되기 전 인간이 먼저 되라고 교육받습니다. 사제든 수도자든 인간적인 성숙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문수 박사


박문수 박사(이하 박 박사) : 정말 시대가 변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1980년대 이전까지는 성직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그럴 필요가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 중산층 신자들이 대거 입교하게 됐죠. 시간과 재정적 여유가 있다 보니 교회 활동에 많이 투신했습니다. 그러면 열정이 생기고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항상 끝에 성직자가 있었던 것이죠. 또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사회는 평등을 강조하는 문화로 넘어가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너무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됩니다.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죠. 성직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자신을 해치는 차원을 넘어 교회에 있는 훌륭한 자원이 활용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 많은 이들이 교회에 참여하도록 열어줘야 하는데, 성직주의는 이를 막고 있어 변화가 필요합니다.

 


조 신부 : 성직주의가 교회 쇄신의 걸림돌이 되는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허 신부 : 교회가 언제 가난한 적이 있었나요. 교회가 언제 배고픈 적이 있었나요. 신자들은 배고파도 교회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성당은 춥지만, 사제관은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더울 수 있었죠. 신자들도 사제에 대해 바라보는 기준이 신앙적이라기보다 ‘잘 생긴 신부’, ‘못생긴 신부’ 등 외적이고 감각적인 부분들이 많이 기준이 되고 회자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가 멋있는 신부님만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요. 아울러 오늘날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상으로 많이 요구되는 것은 겸손한 사제, 절제된 삶을 사는 사제, 신뢰를 줄 수 있는 사제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교과서적인 게 아닙니다. 정말 그 가난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는다면, 계속 스스로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 신부 : 수녀님, 배경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수녀 : 오늘날 신자들 마음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 표현하고 싶은 욕구들이 더 많아졌죠. 과거 교회에서는 이런 부분에 인색했었잖아요. 또 과거엔 일부만 진리를 소유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알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과거에는 전체가 기계처럼 똑딱똑딱 움직이는 그런 교회였다면, 지금은 세상이 파동처럼 연결돼 움직이죠. 그 파동들을 잘 느껴서 빛나게 해줄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조 신부 : 권위주의가 문제 되는 것 같습니다. 성직자의 권위주의는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될까요?



박 박사 : 권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죠. 그 사람 삶의 모습 또는 실천을 통해 획득된 권위와, 상대방이 인정하는 도덕적 권위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권위주의가 해체되는 과정과 그 해체된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변화를 보면 상당히 수평적으로 바뀌었는데, 교회는 이게 여전히 공고하다고 느끼는 거예요. 물론 이건 착시 현상입니다. 교회도 분명 낮아졌는데, 사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굉장히 높아 보이거든요. 이런 착시 현상을 계속 좁혀가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해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졌고, 또 신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신자들만 봐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우리 교회 안에서 권위주의가 불편하다로 끝나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쇄신해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품이 돼줘야 하는데, 이런 것을 권위주의가 막고 있다면 빨리 약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수녀 : 권위는 다른 사람을 통솔하는 힘, 그 자체로 생기는 영향력입니다. 권위는 필요합니다. 반면, 권위주의는 사전적 의미로 ‘일반적인 사실이나 상대의 의견을 무시한 채 기존의 권위에 기대어 사람을 대하거나 사태를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입니다. 이 권위주의가 한 걸음 더 나가면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특별히 공인된 힘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것이 권위주의와 권력으로 넘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 신부 : 동창 신부 모임에 나갔더니, ‘야, 차라리 성직주의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거예요. 신자한테 대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아주 극단적인 표현이었는데요. 성직주의에는 비겁한 성직주의, 무례한 성직주의, 무지한 성직주의 등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비겁한 성직주의는 신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인데, 신자들을 내세워 누군가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례한 성직주의는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성직주의는 몰라서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병자들에 대한 돌봄의 첫 번째 의무는 주임 신부에게 있다는 내용이 본당 사목해설서에 나옵니다. 보좌 신부에게 전담시킨다면 단죄받아 마땅하다고까지 나와 있어 저도 놀랐습니다. 주임 신부와 보좌 신부의 위계 사이에서 병자성사, 병자 영성체 이런 성사 부분은 보좌 신부가 더 많이 나가는 걸 당연시 여겨온 점을 반성했습니다. 위계에 의해 당연히 여겨왔던 관행들도 성직 사회 안에서 무지한 성직주의의 결과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조 신부 : 평신도의 책임은 없을까요? 평신도들의 지나친 사제 의존이 성직주의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요?



박 박사 : 사제 권위주의, 평신도 권위주의는 모두 평신도들의 수동성에 비롯됩니다. 그 수동성은 인생에서 자기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데에서 나옵니다.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기에, 결국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평신도들의 책임 의식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자는 많지만,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 신자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 성직주의를 지속시키는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성직자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교회가 바뀔 수 있습니다.



허 신부 : 성직자와 수도자가 함께 노력하면 분명히 극복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언젠가 젊은 보좌 신부가 본당을 떠날 때 한 신자가 필요한 선물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때 그 신부는 ‘자꾸 그렇게 하면 습관이 되고 점점 큰 것을 바라니까 마음만 잘 받겠다’고 했어요. 그 말에 신자는 감동했다고 해요. 교우가 신부에게 잘 해주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사회생활에 익숙한 평신도들의 모습으로 인해 교회의 본질적 직무가 약화되고, 사제가 거기에 편승하게 되면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죠. 직무를 통해 성화되는 것이 사제요, 평신도이기에 성직주의가 이를 방해하거나 훼방해선 안 됩니다.



이 수녀 : 많은 경우, 전례와 신심 활동에 참여하고, 성당에서 봉사하면 ‘1등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에 다리를 놓는 존재입니다. 신앙에 대한 지성이 있어야 성직자들과 대화도 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교리신학원에서 강의하다 보면 학생들은 ‘배운 내용을 공동체로 돌아가서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토로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보다 신부님들은 더 많이 알고 있으니 겸손하게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말하는 자체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공동체의 작은 일이라도 의견을 표현하고 대화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조 신부 : 교육과 제도 마련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허 신부 : 평신도들은 배운 만큼 바뀝니다. 평신도 교육과 양성에 대한 부분도 결국 사제가 먼저 배움의 길을 멈추지 않는 데 있습니다. 속지주의가 지닌 한계도 뚜렷합니다. 본당 신부는 임기가 채워지면 이동하기 때문에 봉사자를 양성해도 다음 신부와 성향이 맞지 않으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곤 합니다. 이처럼 한계와 어려움도 있지만 계속 공부하고 노력한다면 더 좋은 공동체로 거듭날 것입니다.



박 박사 : 저는 평신도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임도 만들고, 교구 사도직 단체를 인가받아 5년째 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따로 시간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교육은 뭘까. 미사입니다. 십계명이나 「가톨릭교회교리서」에만 충실해도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죠. 많은 기도를 바치진 못하더라도 늘 하는 기도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할 수도 있죠. 평소 하는 것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예비자 교리의 경우, 개신교는 4주면 세례를 받고, 오래도록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천주교는 6~8개월 정도 교육받는데, 3년 안에 대부분 떠납니다. 그 차이가 교육 내용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세례 후 관리의 문제라고 봅니다. 새로운 과정을 만들기보다 기본 제도를 잘 정착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조 신부 : 교육과 제도 개선 이외에 다른 방법은 또 없을까요?



이 수녀 : 성직주의 문제를 얘기하지만, 사제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수녀가 나서고, 수녀도 안 나서면 평신도가 나서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 신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차원이지만, 자꾸만 자기 걸로 가지려고 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허 신부 : 교회는 2000년이 넘은 조직입니다. 제도는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미사의 경우 젊은 사람에게는 재미없게 느껴지겠지만, 구조 하나하나를 보면 모든 구원 역사가 들어가 있죠. 제도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울타리를 벗어날 순 없는 것이죠. 결국 성직자 개인의 태도와 사고방식의 개혁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미사 강론 때 신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게 가장 많습니다. 또 신부가 개인적으로 평신도를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고해성사입니다. 성직자가 이러한 길로 접근하고 노력한다면 길은 무수하게 열려 있다고 봅니다.



조 신부 : 성직주의와 관련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 있다면요?



박 박사 : 쇄신은 성직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자나 평신도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에 충실하면서 두드러질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자아 정체성, 역할 정체성, 비교 정체성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 차원을 늘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리라 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 토론했는데, 주제가 ‘왜 사람들이 제도 종교를 떠나는가’였습니다. 원인 분석을 해보니 그 원인을 뒤집는 답이 나왔는데, 교회를 떠난 사람이 더 잘 살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지닌 힘이 있고, 제도가 지탱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제도의 약점만 지적할 게 아니라, 장점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쇄신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수녀 : 저는 첫 서원하고 한 사제가 얼마나 양들을 살아나게 하는지 실제로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자 한 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습니다. 성직자에게 준 하느님의 은총은 정말 큽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진다면 양들이 즐겁게 풀을 뜯는 아름다운 목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허 신부 : 일상 안에서 질문을 계속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안식년에 산티아고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늘 주의사항처럼 있는 게 길을 잃으면 잃어버렸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곳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을 배웠고, 한 걸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배웠죠. 우리가 성직주의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매일같이 질문하면서 정말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로를 귀하게 여겼으면 합니다. 신자도 줄고, 신부도 줄고, 신학생도 줄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직주의를 논하는 것도 서로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얘깁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귀하게 여긴다면, 성직주의 문제는 찻잔 속에서 조그마한 소용돌이로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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