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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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도의 섬’ 일본 고토를 가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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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신부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1865년 3월 17일 12시30분경 나가사키 오우라본당 주임 프티장(B. Petitjean) 신부에게 10명 정도의 일행이 말을 걸어왔다. 그들은 우라카미 ‘가쿠레 기리시탄’(? れキリシタン, 잠복 그리스도인) 즉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었다.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이들은 프티장 신부에게 기리시탄임을 고백했다. 이 극적인 만남은 ‘기리시탄의 발견’ 혹은 ‘기리시탄의 부활’이라고 표현된다. 소식을 들은 비오 9세 교황은 ‘기적’이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고토와 아마쿠사, 히라도 등지에서 숨어 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켜오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속속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현 서쪽에 있는 고토 열도(五島列島)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는 곳이다. 1월 17~19일 고토시 문화관광과와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초청으로 고토시를 찾아 숨겨진 신앙의 역사를 마주했다.


남은 자들 - 동백꽃잎에 숨겨진 신앙

나가사키로부터 약 100㎞ 정도 떨어진 고토시는 고토 열도 남서부 후쿠에섬에 자리 잡고 있다. 기후도 온화해서 방문 일정 동안 곳곳에서 붉은 동백꽃을 만날 수 있었다. 동백나무는 고토시의 꽃나무일 만큼 ‘고토’를 대표하는 식물이다. 고토시의 후쿠에 공항 별칭도 고토 동백 공항일 정도다.

고토 열도는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푸른 동중국해와 어우러진다. 그 가운데 점점이 박힌 듯한 동백꽃의 인상은 아름다운 풍광을 더한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라는 엔도 슈사쿠 「침묵」의 한 구절처럼, 고토에 뿌려진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시린 듯 투명하게 푸른 바다와 동백꽃잎에 스며있는 몇 백 년 전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신앙은 아프고 처연하다.

일본교회에 신앙이 전해진 것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1550년 나가사키·히라도섬을 시작으로 시마바라, 아마쿠사 지방 등으로 퍼져갔다. 당시 무역의 도시였던 나가사키는 선교 거점이 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증가했고 많은 성당과 시설이 세워졌다. 하지만 1614년 금교령이 내려지고 박해가 시작됐다. 현상금 제도와 성화 밟기(후미에), 불교 입적 제도 등으로 탄압이 가해졌다. 신앙인들은 불교 신자로 위장해야 했고 마음의 짐을 지닌 채 성화를 밟아야 했다. 집에 와서는 ‘콘치리상’(통회의 기도)을 외우며 용서를 청했다. 성화를 디뎠던 짚신은 태워서 그 재를 마시며 속죄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불교 신자로 생활하면서도, 감시의 눈이 먼 곳에서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몰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세례를 받고 기도(오라쇼, oratio)를 바쳤다.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탄을 알리는 1년 전례력을 만들어 하느님을 섬겼다. 오우라성당에 찾아온 신자들은 그렇게 200여 년 사제를 기다리며 지낸 7대째 자손들이었다.

박해 기간 하느님을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표식으로 신앙을 드러냈다. 불상에 가깝게 성모 마리아상을 빚기도 하고, 음식을 담는 그릇 바닥이나 물병 등에 장식처럼 십자가를 새겨놓기도 했다. 쌀 포대를 새끼로 묶을 때 십자 매듭을 지어 십자가로 썼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동백꽃도 가쿠레 기리시탄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됐다. 죽어서 묻힐 때 동백 꽃잎으로 십자가 모양 장식을 했고, 꽃이 피지 않을 때는 그 나뭇 가지를 이용해 십자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인도로 사제가 올 날을 기다렸다.



기도의 섬

고토 열도에는 1566년 영주 우쿠 스미사다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이기도 했던 선교사 루이스 드 알메이다와 일본인 로렌소 료사이를 초청하면서 복음의 싹이 텄다. 완쾌한 영주는 포교를 허락했고, 이후 25명이 세례를 받으면서 기리시탄이 탄생했다. 이후 신자가 2000명에 달할 정도로 커졌으나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고 가혹한 탄압 속에 신자들은 숨어들었다.

에도 시대 말기 1797년 오무라령 소토메(현 나가사키)에서 고토 개척을 위해 108명이 이주해 왔다. 계속해서 모두 3000여 명이 옮겨왔는데, 대부분 가쿠레 기리시탄이었다. ‘마비키’(생활고로 장남을 제외한 신생아를 죽이는 일)와 후미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치고, 자갈투성이 산비탈을 일구는 고된 삶이었지만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기는 좋은 환경이었다. 이들은 ‘조카타’(공동체 책임자)와 ‘미즈카타’(세례 담당), ‘도리쓰기야쿠’(행사 보조와 연락 담당) 등 신자 대표들을 만들어 공동체와 신앙을 지켰다.

1865년 가쿠레 기리시탄의 발견 이후에도 금교령이 풀리지 않으면서 고토의 신자들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 1868년 일어난 ‘고토쿠즈레’가 대표적으로, 히사카지마섬에서 23명이 붙잡힌 것을 계기로 섬 안의 신자 200명이 20㎡ 크기의 감옥에 약 8개월 동안 갇혀 지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은 아침저녁 작은 고구마 한 조각으로 연명했으며, 굶주림과 압사 등으로 42명이 순교했다. ‘다카노스 6인 참수’라는 일반 무사에 의한 그리스도교인 참살 사건 등도 발생했다. 이런 참상은 여러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마침내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됐다.

1877년 두 명의 사제가 도착하고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숨죽였던 신앙은 봉오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신자들은 자진해서 재산과 노동을 바쳐 성당을 세웠고 내부를 장식했다. 대다수 성당 지붕과 창문에서 동백꽃 문양을 볼 수 있다. 동백꽃은 고토의 신앙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고토 열도의 다섯 개 섬에는 49개 성당이 있다. 나가사키현 내에 성당 수가 129개인 것을 감안하면 기리시탄 역사 속에 전수되고 쌓여온 고토 지역 기리시탄들의 신앙 저력이 느껴진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가쿠레 기리시탄 관련 유산’은 2018년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여기에는 ‘에가미 천주당과 그 주변’을 포함한 고토의 네 곳이 포함됐다.








일본 고토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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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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