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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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파견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3. 1815년 사제품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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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나르본의 작은 마을 레삭 도드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오드 강과 오르비외 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레삭 마을 전경.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다

“사랑하는 부모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지상에서 아낌없이 사랑해온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부모님께 이 서한을 올립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당신 독생 성자를 희생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두 분의 아들인 저를 요구하십니다. 어찌 그 희생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부족한 제가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외로 향하는 제 마음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억눌렀지만 결국은 그 강렬한 힘에 압도되어, 하느님의 길을 아는 사사로움과 욕심이 없는 현명한 분들과 의논했습니다. 저는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한 끝에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강한 어조로 부모님의 연세, 저를 아끼시는 두 분의 애정, 두 분께서 받으실 충격 등을 거론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제가 무감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육정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강력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제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어찌 하느님의 섭리를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세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압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추구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무수한 백성의 영적 필요를 헤아리시고, 우리가 애덕으로 도와주길 기도하는 저들의 울부짖음을 살펴주십시오. 두 분은 한탄을 거두시고 오히려 저 가련한 외교인들의 회개에 일조한다고 생각하시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문득 불평불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는 지금 이 순간 내 아들이 외교인의 영혼을 또 하나 구원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두 분께 슬픔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간청합니다. 제가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계획을 저버리는 불충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앞장서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이 세상에서 잠시 헤어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아버지 프랑수아와 어머니 테레즈는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신심 실천이야말로 자녀들의 신앙을 양육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 생가 바로 옆에 있는 레삭 도드 마을 성당 전경.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며 눈물로 이별 통보

교황 파견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기 전날인 1825년 9월 8일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집무실에서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를 완성하기 위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들”이라 쓰고 서명해야 하는데, 감정이 북받쳐 몇 번이고 펜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 힘겹게 마무리했습니다.

저의 동료 선교 사제인 샤스탕 신부도 파리외방전교회로 출발하는 당일 고향에서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놀란 어머니가 샤스탕 신부를 따라와 말리려다 개울에 빠지자 어머니를 구해 둑에다 모셔 놓고 그대로 파리로 떠났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이 편지를 쓰기 얼마 전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교황 파견 선교 사제가 될 것이라는 말을 차마 드리지 못한 채 되돌아왔습니다. 그나마 이 편지로 부모님께 작별을 고해 샤스탕 신부처럼 모진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랑에는 진한 눈물이 있습니다. 저는 아낌없이 저를 사랑해주고 저를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에게서 그 진한 눈물을 봤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주검을 감싸 안고 비통해하는 성모님에게서 저의 부모님의 진한 눈물과 똑같은 사랑을 느끼며 가슴을 적셔왔습니다. 이제 저는 늘 저의 가슴을 적셔온 아름답고 진한 사랑의 눈물을 저를 통해 이방인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길을 나서려 합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신앙의 힘으로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것이고,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두 분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레삭 도드 성당에서 바르텔레미라는 이름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 세례 증명서.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792년 프랑스 레삭 도드에서 태어나다

저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교구 나르본의 레삭 도드(Raissac d’Aude)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랑수아와 어머니 테레즈 사이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와인용 포도를 경작하는 자작농이십니다. 42세에 저를 낳은 어머니는 자녀들 가운데 저를 가장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날 당시 프랑스는 1789년에 일어난 대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낡은 신분제 때문이었죠. 절대 왕정의 프랑스는 법적으로 세 신분 제도로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제3신분은 평민입니다. 이중 성직자와 귀족은 인구의 2에 불과했지만, 세금을 면제받고 관직을 독점하는 등 모든 특권을 누렸습니다. 반면, 98인 평민은 모든 세금을 부담했지만, 정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죠. 그러다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은 법률가와 금융업자, 상공업자들 이른바 부르주아들이 주도해 왕정을 무너뜨리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교회는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혁명 정부에 몰수되고, 성직자들은 왕정 체제 때 누리던 권리와 특권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주교와 사제들은 1790년 4월 14일 공포된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선서해야만 했습니다. 이 법의 골자는 조건 없이 새 정부에 연합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유배되거나 살해됐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모두가 이 선서를 거부하자 혁명 정부는 1792년 신학교를 폐교해 버렸습니다.

대혁명 여파로 프랑스 대부분 도시에서 시민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반면, 농촌에서는 근대주의에 대항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났습니다. 프랑스 북부 노르드와 피카르디, 서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남부 미디-피레네, 동부 알자스 로렌ㆍ프랑슈콩테 지역에서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자란 카르카손 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은 신심 깊은 분들이십니다. 부모님은 신심 실천이야말로 자녀들의 신앙을 양육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집은 레삭 도드 성당 옆에 있어서 가족 모두는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에 열심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프랑스 혁명 동안 고문을 견뎌낸 사제들과 교우들이 증거한 영웅적 행동들을 늘 들려주셨습니다.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저는 어른이 되면 하느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겠다 결심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15년 12월 23일 카르카손교구 주교좌 대성당에서 만 23세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카르카손교구 주교관에 보관 중인 브뤼기에르 주교 사제품에 관한 기록물.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교황청 특별 인가로 만 23세에 사제 수품

저는 이 성당에서 ‘바르텔레미’란 이름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르텔레미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이신 바로톨로메오의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저는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814년 6월 4일 부제품을 받은 저는 카르카손 소신학교 3학년 교사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1815년은 프랑스와 프랑스 교회에 큰 변화가 있던 해였습니다.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공화정과 나폴레옹 시대의 25년 역사가 종지부를 찍고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 임금이 즉위해 왕정 시대를 다시 열었습니다. 교회는 활기를 되찾았고 3월 2일 파리외방전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또 국고 보조금을 받아 신학교들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랑스 교회 안에는 선교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저 역시 교회법상으로 만 24세가 돼야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 교회 재건을 위해 교구 사제들이 많이 필요했고, 해외 선교사 양성을 위한 특별 조치로 교황청의 특별 인가를 받아 만 23세에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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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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