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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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5) 강정 이야기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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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철만 되면 도저히 실현하지도 못할 허구의 약속을 대놓고 외쳐대다가 당선된 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들, 아니면 자신이 내세운 현실을 도외시한 공약에 발목이 잡혀 약속이행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밥상을 통째로 엎어버리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던 이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속물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발휘하며 금력과 권력의 종살이를 하는 학자들을 보며 실망한다. 한때 사법부에서 정의와 공정의 수호자로 처신하였으나 퇴임 후 유명 로펌에 영입되어 전관예우의 고속열차에 올라타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거액 연봉을 단기간에 챙기는 법관들을 보며 우리는 실망한다.


그런데 나는 강정에 다니면서 이런 이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 진실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세상에 빛과 희망을 엿본다. 강정 구럼비 바위 들판이 폭파되기 전 우리는 강정의 평화를 염원하며 바닷가 구럼비 위에서 강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야외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1월 한겨울 구럼비는 바닷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뚝 떨어져 너무나 추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장백의에 제의를 껴입었는데도 어찌나 추웠는지 손가락이 얼어들어 오고 아래위 치아가 딱딱거리며 마주칠 정도로 덜덜 떨려서 강론을 겨우 했던 기억이 난다.


100여 명 가까운 미사 참례자가 있었는데 그중 당시 그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재윤(스테파노) 형제가 미사 내내 함께 칼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켰다. 국회의원이라 미묘한 입장이었을 텐데도 그는 얼굴만 비치고 사라지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미사 후에 고마워서 다가가 인사를 하니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그는 야당의 언론정상특별위원장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감당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입법 로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누차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하였으나 재판부는 4년 형을 선고하였다.


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몇 차례 찾아가 면회하였다. 그의 얼굴은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맑고 청아함으로 빛났다. 나는 그의 무죄함을 의심치 않았다. 또 정권이 바뀌었으나 그는 풀려나지 않았고 2018년 8월 4년 만기를 다 채우고서야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제주에 오자마자 그는 나를 찾아왔다. 오랜 수감생활로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얀 얼굴에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출소 인사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시를 많이 썼고, 이제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2021년 6월 29일 그가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바로 그 전날 과거에 그에게 4년 형을 선고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감사원장까지 지냈던 판사가 대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거짓과 불의가 버젓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너무나 큰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항의하며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만난 정치인 중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강정은 많은 사람을 평화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는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인권, 통일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움을 벌여온 평화의 사도다. 전국 어디서나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이 있는 곳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던 문정현 신부는 강정에도 어김 없이 달려왔다. 주민들이 막강한 군대와 정부를 상대로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서둘러 강정에 이주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공사 현장 선두에서 젊은 경찰관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농성하고 버티었다. 앉아있던 의자 채로 공중 부양으로 들려 쫓겨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바닷가에 설치된 방파제용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포드 위에서 농성하다가 경찰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떠밀려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테트라포드 여러 개를 쌓아놓은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는 10m에 가까웠으니 노인이 그 높이에서 바닥까지 추락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병원에 달려가 보니 문 신부는 의식이 또렷했고 죽다 살아났다며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검사 결과 뇌에는 아무런 출혈이 없었고, 몸 곳곳에 골절과 타박상만 관찰되었다. 천사가 받아안고 땅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고 밖에 달리 상상할 수가 없어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문정현 신부는 평소 농담 반 진담 반 내게 주교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던 문 신부가 어느 날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주교관을 찾아왔다. 자신이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했다가 투옥되었으나 최근 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고 무죄가 선고되어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강정에 땅을 조금 샀다고 했다. 강정에서 평화 운동을 계속 펼쳐가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모이고 함께하는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겠기에 서둘러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땅을 확보는 하였으니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제주교구 주교가 추진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즈음 나는 나대로 지속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강정에 땅을 물색하고 있었다. 몇 군데 후보지가 나왔으나 마을 외곽이어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문 신부가 마을 한복판의 땅을 매입해 버린 것이다. 나는 교회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두 군데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낭비이니 문 신부의 제안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우리는 즉시 함께 건물의 성격과 용도를 논의하고 전국 여러 교구에서 모금을 전개하여 2015년 5월 현재의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완공하였다. 지금도 문 신부는 그곳에 기거하며 매일 길거리 미사를 봉헌하고 나무토막에 좋은 글귀를 새기는 서각으로 시간을 보낸다.


강정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밭농사나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다. 군사기지 건설이 강행되면서 이 시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막강한 군대와 경찰과 공무원들을 상대로 버티고 싸워야 하는 고달픈 나날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농부가 차츰 평화 활동가로 양성되고 성장해 갔다. 나는 해군기지 건설 기간 중 마을 주민을 대표하여 앞장서고 행동했던 강동균 마을회장을 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을회장이란 평소 동네 이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박한 봉사직이었으나 해군기지 갈등이 초래된 이후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비중을 띄게 되었다.


강동균 회장도 평범한 농부였으나 주민들을 대표하여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주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당당하게 정부의 공무원들 그리고 언론에까지 펼치는 평화의 일꾼으로 성장해 갔다. 해군기지가 완공된 후 군사기지 건설 반대 운동은 새로운 단계와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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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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