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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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모방 신부, 서양 선교사로서 조선에 첫발을 딛다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4.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 조선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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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모방 신부 초상화


브뤼기에르 주교 뒤를 따라 조선으로 향해

조선 선교사로 파견된 최초의 사제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였다. 그렇다면 서양인 선교사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이는 누구일까? 임진왜란(1592~1598) 때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사실이 있으나, 그는 군종 사제의 역할을 맡아 일본인 군인을 위해 미사와 성사를 베풀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따라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가장 처음 조선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이어 조선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 모방(Maubant)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선 교우들이 1835년 11월 ‘주교님을 모시러 국경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서로 알아보는 표시로 만신(萬信, ‘전적으로 믿는다’)이라는 두 글자를 택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갑작스러운 선종으로 이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주교와 함께 떠났던 파발꾼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소식 대신 선종 소식을 전했다.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안고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별세를 알려드립니다. 주교님은 달단의 프랑스 라자로회 신부들의 신학교를 1835년 10월 7일에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고, 그달 19일에는 도중에 어떤 교우 집에 이르러 몸을 쉬며 남경 주교님의 편지를 기다려 요동으로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20일 저녁을 드신 다음에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모방 신부가 어떻게 하려는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만 그가 조선을 향하여 떠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여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나는 외지인 달단에서 죽을 것입니다. 천주의 성의(聖意)가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는 지금 주교님이 천국에서 당신이 맡으셨던 포교지를 위하여 천주께 전구하시리라는 것을 굳이 바라 마지 않습니다.”(중국 산서(山西 )대목구 알퐁소 드 도나타 보좌주교의 편지)

이 소식을 들은 모방 신부는 마가자(馬架子)의 펠리구 교우촌에 도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길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따라 조선을 향해 떠났다. 그는 한양에 도착하여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는지 전하고 있다.
 
「주교요지」. 초기 한국 교회 주역 중 하나인 정약종이 저술한 교리서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말로 지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라고 할 수 있다. 정약종이 1786년에 입교해 1801년에 순교하였으므로 저작 연도는 1786~1801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최초로 채택한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오른쪽).1864년 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주교에 의해 처음 목판 인쇄로 간행된 이 책은 동명의 한문본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천주교 근본 교리를 문답식으로 풀이했다. 「성교요리문답」이 어느 시대에 도입됐는지, 언제 한글로 번역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1838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가 당시 중국에 널리 보급된 「성교요리문답」을 갖고 들어와 전교에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성교요리문답」은 1934년 「천주교요리문답」이 나오기까지 70년간 한국 교회 유일한 교리서였다.


국경 세관원 검문 피하려 수구문으로 입국

“…세관의 관리들이 보통 어느 길손에게나 하는 검사와 질문을 받는 위험을 당하지 않으려고 저희들은 이 읍을 둘러싼 성(城)에 만들어 놓은 수문(水門)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인도자 중 한 사람이 벌써 수문을 빠져나가 탄착거리 앞에 갔을 즈음에 세관의 개 한 마리가 우리가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짖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는 모두가 허사로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세관원들이 와서 우리가 몰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질문을 늘어놓을 것이고, 틀림없이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아낼 것이다.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허락하지 않으시어, 저희들은 계속하여 읍내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금에 절인 무와 맹물로 지은 쌀밥으로 초라한 요기를 하고 나서 그 좁은 방에 6명이 그럭저럭 누워 날이 샐 때까지 나머지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제 발은 여러 군데가 부르텄습니다만, 이런 고생쯤으로는 선교사의 걸음이 멈추어지지는 않습니다. …갑사 주교님이 주신 돈으로 2년 전 교우들이 사 놓은 집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거기서 유 신부와 20명가량의 교우를 만났습니다.”

서양 선교사로 첫발을 내딛는 모방 신부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수구문(水口門)으로 빠져나가려다가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위험에 처할 뻔하였다. 초라한 식사에 추운 겨울 부르튼 발을 움직여 한양에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는 서울 정하상(바오로)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받고자 하는 신자들의 열성과 청원으로, 한문을 아는 신자들은 글로 써서 성사를 주고, 한문을 모르는 이는 통역까지 두고 성사를 베풀었다. 부활 예식을 거행하면서, 십자가도 부활초도 머리 위로 들어 올릴 수 없다고 얘기하였다. 조선 집에서는 도저히 그럴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방 신부는 부활을 맞은 후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전교활동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이미 정착된 교우촌의 기도방식을 채택하고, 회장들을 임명하여 주일과 축일 모임을 이어가게 하였다.
 
(왼쪽부터) 「성경직해광익」과 「성경광익」, 「성경직해」. 「성경직해광익」은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합쳐 편찬한 필사본이다.


소년 최양업·최방제·김대건 뽑아 유학 준비

“부활절 후에 모방 신부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그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는데 16 내지 17개 교우촌을 방문하였다. 12월(양력)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성세(세례성사)를 주고, 600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할 수 있는 곳에 회장들을 세워 주일과 축일에 신자들을 모으게 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 등을 몇 대목 읽고, 그런 다음 대개는 마을에서 가장 능력 있고 학식 있는 교우인 회장이 낭독한 대목을 해석하였다.”

모방 신부는 교우촌을 다니면서 그동안 목자 없이 헤매고 있던 양들을 돌보았는데, 이미 여러 교우촌에서 체계적으로 하고 있던 기도와 독서를 보고 놀라워하였다.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와 복음해설서를 주일 집회 때 이용하여 공부하고 낭독하고 있었다.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있던 교리서는 정약종이 저술한 「주교요지」라고 불리는 한글 교리서였고, 또한 중국의 문답 교리서인 「성교요리」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복음해설서와 묵상서인 「성경직해광익」이라는 한글 복음성경을 채택하여 집회 때 신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모방 신부는 또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최양업·최방제·김대건 소년을 차례로 뽑아 한양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키며 유학 보낼 준비를 했다. 1년 후 파리외방전교회 샤스탕(Chastan) 신부가 조선에 왔고, 다시 1년 후에 앵베르(Imbert) 주교까지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이제 3인의 파리외방 선교사 시대를 맞이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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