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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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五聖)바위와 뚜께우물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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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순교자 성월은 한국교회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고 따라 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달이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신자들은 다른 때보다 순교자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지순례에 더욱 힘쓴다.
성지 안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순교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있기도 하고 아직 성지로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에도 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순교자들의 역사가 배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올해 순교자 성월을 시작하면서 ‘오성바위’를 비롯해 신자들이 순교 신심을 배울 수 있는 장소와 유물들을 소개한다.

 

■ 주님 위해 기쁘게 죽음 맞은 다섯 성인의 모습 떠올리며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 마지막 길 안식처 ‘오성바위’

 

 

현재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한편에 보호유리에 덮여 보존되고 있는 ‘오성(五聖)바위’가 본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충무로 591(동천리 235-2)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는 많지 않다.

 

 

오성바위는 다섯 성인이 병인박해 때인 1866년 처형장에 가는 길에 앉아서 쉬어 갔다는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 성인은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루카), 장주기(요셉)이다. 다섯 성인은 1866년 3월 24일 서울에서 형을 선고받은 뒤 다블뤼 주교의 바람대로 1866년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인 3월 30일 서울에서 250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오성바위는 다섯 성인이 서울에서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기쁜 마음으로 성가를 부른 장소이자, 인근 신자들이 찾아와 다블뤼 주교의 마지막 강론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처형을 앞두고 다섯 성인이 오성바위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은 본래 오성바위가 있던 자리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공유지에 대전교구 온양본당 교우들이 2011년 11월 11일에 다섯 성인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오성바위와 닮은 바위를 가져다 놓았다.


 

 

다섯 성인이 처형 전 실제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는 1973년 4월 12일 당시 절두산순교성지 주임이던 박희봉 신부(이시도로, 1924~1988), 한국교회 순교자 현양운동을 주도하던 오기선 신부(요셉, 1907~1990)가 절두산순교성지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옆자리에 이전했다. 오성바위는 1984년 전에는 ‘복자바위’로 불리다 다섯 성인이 시성된 후 오성바위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래 동천리에 있던 오성바위 역사를 연구한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전 연구원 김윤배(판크라시오·84·대전교구 아산 온양용화동본당) 씨는 “오성바위 바로 옆에 있던 초가집이 가까운 지인의 집이어서 오성바위를 자주 보곤 했다”고 말했다. 김윤배 전 연구원은 “순교 유물은 본래 있던 곳에 다시 복원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면서 “오성바위를 원위치에 복원한 뒤 주변 성역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8월 22일 오성바위 본래 위치를 답사한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부회장도 “오성바위가 절두산순교성지에 있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볼 수는 있겠지만 순교 유물은 제 위치에 복원하는 것이 그 역사를 살리는 길”이라고 밝혔다. 다행히 오성바위가 있던 자리와 느티나무 주변 대지 258㎡(78평)를 2022년 11월 대전교구가 오랜 노력 끝에 매입해 성역화 토대를 마련해 놓은 상황이다.


 

 

■ 우물에 씻겨나간 순교자의 피
     서울대교구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뚜께우물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이자 한국교회 대표적 순교 성지인 서울대교구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는 ‘뚜께우물’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우물이 있다. 성지 내 순교자 현양탑을 지나 ‘노숙자 예수상’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뚜께우물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찾는 순례자들도 모른 채 지나치기 쉽다.

 

 

뚜께우물은 깊고 물의 양이 많아 평상시에는 덮개를 덮어 두고 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처형하고 나서야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다고 전해진다. 망나니가 사형을 집행할 때,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칼날에 뿜어 대며 죄인 주위를 돌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돈을 던져 주었다. 되도록 고통을 주지 말고 단칼에 죽여 달라는 뜻이었다.

 

 

뚜께우물은 일제강점기에 ‘개정’(蓋井)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었고 주변 마을도 ‘개정동’이라 불리다가 해방 후 우리말 지명을 되찾을 때 ‘뚜께우물’로 다시 부르게 됐다.

 

 

■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숭고한 신앙
     대전교구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자리개돌과 해미읍성 호야나무

 

 

충남 서산 해미읍성과 대전교구 해미순교자국제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숭고한 피가 배어 있는 ‘자리개돌’과 ‘호야나무’가 보존돼 있다. 

 

 

자리개돌은 본래 서산 해미읍성 서문 밖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 식탁처럼 넓은 모양의 바위지만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포졸들은 천주교인의 사지를 붙잡고 자리개돌 위에 내리쳐 죽였다. 이와 같은 처형 방법을 ‘자리개형’이라 부르기도 했다.

 

 

자리개돌은 1956년 서산성당 앞에 이전, 보존하다가 1986년 병인박해 120주년을 기념해 1986년 9월 본래 자리하던 서문 밖 순교성지 안에 다시 옮겼지만, 2009년 해미에 새 도로가 개설되면서 해미국제성지 생매장 순교지 유해참배실 앞에 터를 마련하고 새로이 단장해 보존하고 있다. 

 

 

또한 교우들이 갇혀 있던 해미읍성 감옥 터 옆에는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호야나무에 머리채를 묶인 채 모진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유적이다.


 

 

■ 순교 역사와 고통 지금도 고스란히
     수원교구 죽산성지 두둘기바위

 

 

수원교구 안성에 자리한 죽산순교성지 입구 삼거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표지석은 ‘두둘기바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죽산순교성지를 처음 찾는 순례자들은 종종 못 보고 지나치기도 하는 두둘기바위는 안성시 삼죽면 ‘두둘기’라는 곳에서 옮겨온 바위다.

 

 

‘두둘기’라는 지명은 지금은 옛 자취가 사라졌지만 박해시기에 포졸들이 삼죽면 일대에서 천주교 신자를 잡으면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심하게 두들겨 팼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두둘기’가 됐다고 전해진다. 죽산 읍내에서 6km 떨어진 두둘기에 있던 바위를 옮겨 세운 죽산순교성지 표지석은 신앙선조들이 겪었던 순교의 역사와 고통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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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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