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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3) 토마스아퀴나스 ②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깊은 영성으로 성체찬미가·신학대전 집편, 1880년 모든 학교 수호성인으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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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년의 일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대 최고의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로마의 신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전수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토마스의 위대함이 한층 빛을 발하는 일이 생긴다. 당시 교회는 성체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약했다. 벨기에에서 시작된 성체 축일도 당시로선 몇몇 나라에서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은 성체 축일을 전세계 공통의 축일로 정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들어갈 성체찬미가가 필요했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당대 또 한 명의 석학이었던 보나벤투라에게 이 일을 맡겼다. 성체 찬미가는 영성적으로도 완벽해야 했으며, 신학적으로도 오류가 없어야 했다. 이에 보나벤투라와 토마스는 기도 안에서 성체 찬미가를 작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히 토마스의 찬미가를 보게된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하고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는 찢어버린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의 것을 채택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포함토록 했다. 그 내용이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날 어떤 영성가와 신학자도 이처럼 완벽하게 성체 영성의 깊이를 문자로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계의 불후의 걸작으로 남아있는 ‘숨마 테올로지카’(Summa Theologica), 즉 신학대전(神學大全)이다.

로마에 있을 당시 착수된 신학대전 집필은 이후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계속 진행됐다. 하느님께선 이 책에 각별한 축복으로 응답하셨다. 하루는 하느님이 토마스에게 나타나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토마스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문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작업들을 병행했다.

이런 가운데, 토마스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미사 도중이었다. 토마스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지금까지 열정을 다했던 집필 작업을 돌연 중단한다. 당시 토마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친구가 왜 글을 더 이상 쓰지 않느냐고 묻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순히 뛰어난 신학자이자 교회 박사로만 알아선 곤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토마스는 하느님과의 완벽한 일치 안에서 살았던 영성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학은 영성의 문자화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이 일 이후에 토마스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토마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토마스 사후 직후에 쓰여진 전기문들에 등장한다.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리용에서 공의회를 소집, 토마스를 부르자 토마스는 공의회 참석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토마스는 리용으로 향하던 도중 조카딸 집에서 중병을 얻는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 사람들이 그를 인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아직도 세상은 그의 신학적 해석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했다. 친구가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청했다. 토마스는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젠 그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려졌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323년에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 됐다. 1880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이 될 수 있을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요한 22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가 모르던 문제를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결할 때마다, 그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정영식 신부(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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