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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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7.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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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성인은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고 수도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사진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지역에서 한 작은형제회 수도자가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는 무슬림 팔레스타인들에게 음식 섭취가 허용된 밤 시간에 빵과 물을 나눠주고 있다. 【CNS】

 

 


프란치스코는 ‘주님’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종이쪽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소중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 안에 주님의 현존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그런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쓰인 글을 발견하면 길에서나 집에서나 땅바닥에서나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서, 거룩한 장소나 합당한 곳에 가져다 놓곤 하였다. 주님의 이름이나 성경 말씀과 관련된 글들이 그러한 곳에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그에게 질문하기를, 주님의 이름이 비치지도 않은 글이나 이단자들의 글까지도 그렇게 지성으로 줍느냐고 하였다. 그가 대답하였다. ‘아들이여, 주 하느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신 이름을 쓰는 데 사용되는 글자들이 그중에 같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이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방인들의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며, 오로지 모든 선이 깃들어 있는 오로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존경심의 자세는 본래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해주도록 창조된 존재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함께함보다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다른 모든 피조물)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해 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 곧 현재의 내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의식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는 이들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지니신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각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가? 내가 존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인격에 대한 존중은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누가 인격들인가? 내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데 누구도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인격들이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가서 그분의 사랑과 인내, 겸손, 존경심 등으로 치유하기 위해 우리 각자의 느낌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의 문고리는 문 안쪽에 달려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 그런 개방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며 기쁘게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는 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 곧 하느님의 속성이며,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마음의 자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과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호 교환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에게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이렇듯이 덕을 지닌다는 것은 그 덕의 원천이시며 그 덕을 당신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해 주신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 혹은 수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존재적인 앎, 혹은 온몸으로 아는 지식인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하지만 생각이나 사고만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긍정의 덕을 행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를 변화시켜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참여적 앎과 존재적 앎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양은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결국은 이런 수양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일이며, 결국 우리 삶과 존재가 성령의 일치하시는 힘으로 인해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변모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통 전체의 핵심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해주시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필자에게 이런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를 바라보아주시는 그 눈으로 저도 저를 바라보게 해주시고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이 기도의 주된 목적은 ‘의식’에 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할 때 의식함 없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마음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의식하며 바라본다면 그것은 정확히 ‘행하는 것’, ‘수양하는 것’이 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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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6-2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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