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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이야기] (82)네가 나를 얼마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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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강렬한 5월의 어느 날 신학교 안에서는 전 학년 씨름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각 학년에서 체급별로 씨름을 잘할 것 같은 메이저 선수와 가장 씨름을 못할 것 같은 마이너 선수의 경기가 각각 벌어지고 있었다. 신학교의 씨름대회는 씨름왕을 뽑겠다는 목적보다는 전교생이 한바탕 웃고 즐기기 위한 의미가 더 강했다. 이런 이유로 이 대회의 관전 포인트는 어설픈 마이너 선수들의 경기에 쏠려 있었다. 약골 선수들의 경기는 전교생에게 재미와 흥미를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몸이 허약하고 깡마른 마르코는 마이너 선수로 선발되었다. 상대방 선수 역시 만만치 않은 약골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빅매치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마르코와 상대 선수는 모래경기장에 올라앉아 샅바를 매고 있었다. 모래판에 등장한 상대 선수는 반바지 차림에 하얀 깡마른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르코는 긴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그 모습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샅바를 힘껏 움켜쥔 채 기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상대가 먼저 마르코를 자신의 배 앞으로 힘껏 끌어당겨 올렸다. 마르코는 사력을 다해 공중에서 균형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학생들은 포복절도하기 시작했다. 운동복 바지 속에 빨간 줄무늬 겨울 내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바탕 웃음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마르코는 결국 모래판 위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마르코는 3전 2패로 패자가 되었지만, 웃음보따리를 선사한 그 날의 MVP였다.

이 사건 이후로 마르코는 일 년 내내 빨간 내복을 입는 공인 약골로 알려졌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학생들이었기에 몸이 허약한 마르코를 재미로 놀리는 일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멋진 사나이의 모습은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 상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코가 이 사건으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마르코에게 장난을 걸며 농담을 건네곤 하였다. 오히려 친하니까 신체와 관련된 농담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심지어 마르코가 그만 놀리라고 화를 내도 애교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코는 급우들 앞에서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폭발했다.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 교단에 오른 마르코는 친구들을 향해 울분이 섞인 욕설로 분노를 터뜨렸다.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벌써 30년 전 일이라 마르코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귓가에 또렷이 기억되는 한 가지 말이 있었다. 마르코는 온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네들이 나를 알아?”

마르코는 그렇게 화를 내고 난 얼마 후 신학교를 홀연히 떠나버렸다. 떠난 자는 더 이상 말이 없지만, 남은 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더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 부모가 품에서 낳아 길러왔기에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몇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이기에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구와의 관계가 생각보다 힘들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서로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에 더 조심하고 배려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좀 더 상대를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사랑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섬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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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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