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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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모상이란 우리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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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모상이란 바로 우리의 집(존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귀도 디 피에트로, ‘주님 탄생 예고’, 프레스코화, 1437~1446, 산 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차지하시게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느님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새날의 햇살이 어린 잔디 위에 내려앉은 이슬방울들을 비추는 곳에 현존하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홀로 당신만이 알고 계신 작은 들꽃들이 있는 곳에 계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밤이 땅속으로 쇠하여 사라지는 순간에 홀연히 바람에 실려 지나가신다.

무한히 위대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 자신의 순수함을 나누어주셨다. 홀로 당신만이 사랑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사랑이시다. 그분의 순수한 불꽃은 모든 것들을 존중해 주기에 어느 것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를 소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맡겨주신다. 그분은 절대로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이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취하여 파괴하지만 말이다.

그분은 모든 존재에게 그들인 바대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들에게 감사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께서는 모든 존재가 당신 은총과 사랑을 받아 양육되기를 바라신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은 커지고 증가하여 이로써 그분을 자연스럽게 찬미하게 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바라보셨을 뿐, 그것들을 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셨을 뿐, 그것들을 속박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르다. 그분의 사랑은 비-소유적이다. 그분의 사랑은 순수하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는 굶주림이 없다.”

루카 복음 11장 27-28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라는 집을 차지하셨다. 마리아는 아주 작은 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저 단순하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말했을 뿐이고, 이 자그마한 집인 성모님은 천사의 말에 그저 “예”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천사는 성모님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후 제대로 잘 준비되어 있을 때 와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말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이 기대하지 않은 때에 그저 홀연히 성모님에게 왔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라고 대답하시면서 마리아의 체험이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가능성임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기억하여 자신의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지키며 잘 성숙시켜서 세상에 탄생시키는 이가 참으로 복되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며 그 말씀은 우리에게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두려움이다. 즉 당신 집을 지키기 위한 노파심과 염려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사랑이 현존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고, 이 두려움은 하느님의 집과 그분의 내재적 현존 때문에 오는 염려와 걱정이다. 하느님의 집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의 수호자이시며 방어자이시나이다. 당신은 용기이시며, 당신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우리의 희망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믿음이시며, 우리의 위로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며, 위대하고도 감탄하올 주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세주이시나이다.”(‘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프란치스코가 이해하는 바로는 하느님의 모상이란 바로 우리의 집(존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 규칙」 23장에서와 같은 고백을 권고 말씀 5번에서도 하고 있다. “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듣고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처럼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사셨으며 그것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보고 듣고 맛보고 걷고 말하고 느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만들어진 이 선물을 어찌 거부하고 미워하며 무시할 수 있겠는가!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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