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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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23. 사회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②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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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의 발 씻어주는 일은 종들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고 ‘서로’ 실천해야 할 사명임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다. 지거 쾨더(1925~2015)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필요에 응답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서로를 고립시키고 분열시키는 사슬을 끊고 그 자리에 소속감과 유대감의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새 계명에서 예수님께서는 ‘상호적인 사랑’을 강조하신다. 필요에 응답하는 이웃 사랑과 더불어 ‘상호적인 사랑’은 형제적인 관계 회복 및 참다운 공동체 형성의 특별한 처방이 담겨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이 선포되는 맥락은 ‘최후의 만찬’에서 ‘발 씻김 예식’를 거행할 때였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종’이나 ‘제자’는 밖에서 돌아온 ‘주인’이나 ‘스승’의 발을 씻겨주었다. 하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은 반대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이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예수님의 행위를 저지하였다. 예수님은 옛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를 진정시키며, 새로운 가치 세계로 제자들을 안내한다. “스승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 요컨대 발 씻어주는 일은 종들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나’가 해야 할 일이고 ‘서로’ 실천해야 할 사명임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다.



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

예수님은 왜 하필 손이 아니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 발은 오늘날처럼 좋은 신발과 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에 늘 상처 나기 쉬운 부위였다. 따라서 발을 씻어주라는 계명은 위생적인 차원과 함께 상처받기 쉬운 부분을 서로 보듬어주고 어루만져 주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해주라고 당부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어린아이 시절 자신의 연약함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할 때, 아이는 상처를 입는다. 그 결과 성장 과정에서 강한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고 애쓴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입은 상처로 우리는 ‘강함’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것의 부작용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모질게 대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하기보다는 봉사 받기를 더 원하고 상대방을 인정하기보다는 지배하려고 힘쓴다. 상대방을 지배하려면 상대의 약점을 잡는 것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이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평탄치 않다. 이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의 연약함을 감싸줌으로써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서로에게 ‘상생의 집’이 되어주고, 더 나아가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미사 강론 시간에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에 천국과 지옥의 광경을 비교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방문하여 식당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천국에만 산해진미가 차려진 것이 아니라 지옥에도 천국과 마찬가지로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더라는 것이다. 또한 천국과 지옥 사람들은 똑같은 조건에서 살고 있었지만 천국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발그레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인데 반해, 지옥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하고, 시기 질투와 탐욕, 그리고 불만족에 찌든 모습이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천국과 지옥 식당에 있는 긴 숟가락과 젓가락에 그 비밀이 있었는데, 천국의 사람들은 식탁 한가운데 차려진 산해진미를 긴 수저로 서로에게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반해 지옥 사람들은 긴 수저로 산해진미를 떠서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여주는 데 사용하는 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욕구만을 채우려고 했기에 산해진미를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예화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천국 사람들이 사용한 긴 수저처럼 서로에게 치유와 사랑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모질게 대하는 불행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도록 명하셨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의 핵심은 서로 용서를 베풀고, 서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감싸 안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져주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커뮤니티(Community)는 ‘친교’를 뜻하는 라틴어 ‘콤뮤니오’(Commuio)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공동체 말은 라틴어 com(함께) + munere(짐을 져주다)의 합성어인데, 이것은 서로가 함께 짐을 져줄 때 비로소 참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도와줄 때, 어떤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우리 각자의 부족함과 약함이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서로가 보듬어 줌으로써 그것이 치유되고 더 쉽게 ‘온전함’(Holiness)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서로의 짐을 져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전함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약한 존재일지라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때, 그것은 이 세상에 도래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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