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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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 새로운 현실, 새로운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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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는 지식이나 법칙을 경험칙(經驗則)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순수한 논리와 당위의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에, 경험칙을 통해서 이론과 논리의 허점들을 채워 갑니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에 유명한 요리학교 출신 주방장이 일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주방장이 있는 식당이라면 ‘맛집’일 거라고 짐작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겠지요. 하지만 막상 식당을 다녀온 사람들마다 음식 간이 안 맞고 상한 냄새가 나더라고 불평한다면, 그 또한 쉽게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개 논리뿐만 아니라 경험칙을 고려해서 판단하지요. 주방장의 경력을 믿고 식당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직접 음식을 먹어본 이들의 경험을 믿고 다른 식당으로 가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경험한 바가 다른 까닭에, 경험칙도 모두에게 다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상처받고 배신당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마땅히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마저도 의심하고 곱게 보지 못합니다. 이해와 신뢰의 경험이 컸던 사람은 그 반대겠지요.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형성한 경험칙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뭇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그 자체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것이니까요. 경험을 고려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시신을 빼돌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것보다, 그 추종자들이 음모를 꾸며 조작했을 거라는 추측이 그들의 경험칙에 더 부합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고 배운 제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부활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가득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답게,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으로 포도주가 넘쳐나고 병자가 치유되며, 죽은 아이가 되살아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고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라고 탄복할 만큼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5000명을 먹이시고, 타볼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모습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묻히십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십자가형을 당한다는 것은 지독하게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처형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저주 아래 죽는다는 것을 뜻하고(갈라 3,13), 하느님 계약의 백성의 ‘장막 밖에서’ 죽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형은 하느님을 모르는 범죄자의 죽음,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추방되어 죽는 죽음을 뜻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일 뿐이었지요.(1코린 1,23) 스승 예수가 하느님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분인 줄 알았는데, 철저히 버림받은 모습으로 생을 마치다니…. 제자들은 좌절 속에 쓸쓸히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겁에 질려 다락방에 칩거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 눈을 밝혀 하느님 사랑의 참뜻을 깨닫게 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모습으로 만나면서 제자들은 이전에 체험했던 사랑의 진면목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파스카 이전에도 제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고 울부짖는 과부에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고통과 슬픔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알았지요. 하지만 그 사랑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이해하게 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사랑, 가장 처참한 죽음을 통해 성자를 부활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제자들은 고통스런 환난의 시간에도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부활에 부르시는 아버지의 사랑도 드러납니다. 부활은 고통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순간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습니다. 사랑은 대가를 얻기 위해 행하는 의무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 장밋빛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함께하는 것이고, 어떤 환난도 함께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실”(묵시 21,4)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사도 14,22) 환난의 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 고통이 오히려 하느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라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환난의 순간마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서로 고통의 시간에 함께함으로써 사랑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구약에도, 또 다른 종교에도 흔히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알려주시는 그 참사랑을 서로에게 보여주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탁월한 자리인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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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5-1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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