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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48. 땅을 알아보는 순간이 바로 사랑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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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없는 여름의 초입에는 모든 생명이 잠자고 있는 듯 조용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그들은 깊은 내적 작업,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볼 때에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실재 앞에서 차분히 머무르는 행위”(「찬미받으소서」 222항)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이다. 부산하게 조급하게 가려는 이들에게 생명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상추가 흔한 계절이라 상추는 씨를 뿌리면 나온다는 공식으로 키워서 먹는다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 있겠지만, 차분히 머무를 수 없는 손길에서는 그 흔한 상추 한 잎도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는 농부들의 ‘차분히 머무르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게 되며 감사드리게 된다. 그 음식을 먹으면서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 안에는 이 ‘차분함’이 몸 안에서 자라게 된다. 그것은 어떤 것도 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감사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감사를 아는 이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땅을 일구는 삶에서 도시 생활로 전환하면서 약간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정서가 달라지고, 언어 표현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연한 과정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흙에서 살면서 1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흙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쉽게 알고 싶은 내 욕심이 너무 과했다. 노동자들의 애달픈 마음을 어떻게 고작 몇 달 만에 알 수 있으며, 전쟁과 쿠데타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가슴을 어떻게 단 몇 번의 기도에 쓸어줄 수 있으며, 원전과 화력발전소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땅과 거주민들의 불안함을 어떻게 몇 번의 순례로 다 공감할 수 있겠는가? 농사짓는 첫해에 호미로 무수히 손가락을 찍어서 손이 멍들고, 으레 땀범벅이 되려니 생각하며 묵묵히 땅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에 ‘땅’을 ‘땅’으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 서리에서 묵묵히 가다 보면 내 눈이 제대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믿게 된다.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이 사랑은 시작되었다.

지난 금요일 서울역에서 밥 나눔을 하면서 나는 문득 땅을 알아보는 그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어르신,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씀드리며 국밥 그릇을 전해드렸는데, 받으시는 그 손이 마치 성체를 받으시는 그 모습처럼 다가왔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씀드렸지만, 내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처럼 다가왔고, 받으시는 분들께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시는 것이, ‘아멘’으로 다가왔다. 이 일이 우리 주님과 일치하는 성체성사처럼 다가왔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빵을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오병이어의 자리가 되게 했다.

그런데 역 주변의 상점에 근무하시는 분이 갑자기 오셔서 다짜고짜 우리에게 항의하셨다. “밥 자꾸 나눠주지 마세요. 저 사람들이 자꾸 역사 안으로 들어오고, 쓰레기를 버리고 간단 말입니다. 당신네는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요. 밥 나눠주지 마세요. 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셨다. 밥 나눔에 참여한 봉사자들과 길게 줄 선 노숙인들이 일제히 그분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을 느끼셨는지 목소리를 낮추시고, 조용히 가버리셨다. 안 그래도 손 내밀기 어려워하는 노숙인들의 손을 감추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더 따뜻한 목소리로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씀드렸고, 예수님께서 떼어주신 빵을 나누는 마음으로 정성껏 전해드렸다. 이것이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랑’이다. 주님과 함께 현재를 사는 것, 그분의 시간을 현재 우리의 시간으로 가져와 그분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전부였던 소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땔감 삼아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고, 오롯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른 엘리사 예언자의 나눔이 서울역 그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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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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