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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수줍은 검정비닐 봉지

이주영 수녀(대구 요한바오로2세어린이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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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작은 음악회 준비로 한창 분주한 날이었다. 어린이집 정원에서 봉사자들과 무대 준비를 어떻게 할까 얘기하고 있는데 대한이 엄마가 멀찍이 서서 눈으로 나를 자꾸 보자고 한다. 등 뒤에는 5살 난 대한이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무슨 일이기에?`하며 다가갔더니 아이 가방 속에서 부스럭 부스럭 무엇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지 않는가!
 찰나에 많은 것이 손 위에 짜르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대한이 엄마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총총히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손 위에 올려진 검정비닐 봉지를 열어보니 작은 산 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주웠을까? 선물용으로 알이 굵은 상품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대한이 엄마의 소박한 사랑에 탈색되지 않은 순수함이 있구나 싶어 마음 가득 감동이 밀려왔다.
 다섯 살이 되도록 엄마 품에 아기처럼 안겨 집에만 있던 대한이가 어린이집을 찾은 지난 3월, "장애 전담 어린이집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동사무소에서 수녀원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다는 말만 듣고 찾아왔다"고 처음 말문을 연 대한 엄마!
 "수녀님은 매스컴에 오르는 어린이집과는 다르게 진짜 잘 봐주실 거라고 믿어요. 우리 아이는 아프잖아요"하며 무릎에 내린 아이를 나는 꼬옥 껴안았다. 다섯 살이지만 엄지손가락을 빨며 엄마 품에 안긴 대한이가 그렇게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와 여정을 시작한 지 7개월째다.
 매일 무거운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대한이 엄마에게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됐다. 물리치료사와 열심히 상담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치료법을 익혀 아이를 돌봤단다.
 차츰 아이에게 변화가 일어났고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처진 아이가 버둥거려도 무겁지 않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날 하원 시간, 앞마당 정원에서 대한이가 비틀거리며 엄마를 향해 몇 발자국 떼기를 여러 번…. 쓰러지듯 엄마 품으로 넘어져도 엄마와 아이가 웃기를 반복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당장 밖으로 달려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사무실에서 숨죽이고 서서 창밖을 향해 힘찬 격려의 박수를 혼자서 막 쳐주었다. 그래 우리 천천히 세상을 향해 같이 나아가자!
 대한이 엄마의 검정비닐 봉지는 힘들고 지루한 길이지만 아들과 함께 지금처럼 한 발 한 발 걸어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린이집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이자 장애를 입은 아이들에게 변함없는 울타리가 돼달라는 작은 소망이라 여겨진다. 오늘 아침 내 마음에 특별한 따스함이 남아 있다. 바쁜 일정으로 다 식어버리기 전에 이 마음으로 아이들을 안아주기 위해 교실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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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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