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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 <3>그리스도교 미술의 한국화 방향, 그 가능성의 탐구와 모색

조광호 신부(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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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를 등잔불이라고 가정한다면 종교의 영적 에너지라 할 수 있는 미술은 기름이다. 그 아무리 기름이 가득한 등잔이라 하더라도 예술이라는 또 다른 영적 에너지인 불을 붙이지 않는다면 그 등잔은 결코 빛을 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란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영적인 실재와 만남을 추구한다. 유한성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 실재와 만남이란 상징적 체계를 통하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사물의 상징화를 통하지 않고 종교적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종교가 참으로 진실한 종교일 때 그 안에 그윽한 예술적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며 예술이 참으로 진실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종교적 초월성을 경험한다`는 보편적 진리 안에서 우리는 종교와 예술의 올바른 관계를 조명할 수가 있다고 본다.

 요한 복음서는 서문에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요한 1,18)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상(image)을 지니고 있다. 어떠한 종교도 그 진리를 추상개념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종교는 언어를 상실한 종교가 된다.
 `그리스도교 미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가톨릭 문학` 혹은 `그리스도교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조형예술에서 그 상징적 의미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로저 하젤턴은 예술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결정짓는 요소는 어디까지나 그 작품 속에 담긴 정신이 복음적일 때 가능하다고 봤다. 다시 말해서 복음 정신이 어떻게 그 작품 속에 융화돼 있느냐에 그리스도교 미술의 존폐와 진위가 달렸다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이 지닌 복음의 현존성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드러난다면 그러한 작품은 분명히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작품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 미술은 초기엔 박해와 개화시기를 거치며 여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또 교회 지도자의 문화 이해와 인식 부족으로 성당 건축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서구 가톨릭 미술의 모방에 그쳤다. 1924년 장발 외 여러 가톨릭 미술가 등장은 국내 가톨릭 미술계에 빛을 던져주는 계기였으나 전반적 흐름은 여전히 서구미술 영향 아래 있었다.

 1954년엔 장발을 중심으로 가톨릭 미술가들이 참여한 `성미술전`이 열렸다. 그들은 가톨릭교회 내 조형예술이 서구교회의 단순한 모방이나 일방적 수용에서 벗어나 한국교회 안에 그리스도교 미술의 독창적인 발전을 모색했다. 또한 이 시기 성당 건축은 독일인 신부 알빈과 이희태의 근대적 건축 양식을 통해 중세교회 양식에서 벗어났다.

 그후 1971년 가톨릭 미술회가 결성됐고 1980년대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세계에 유례없는 성당건축 붐이 일어나 한국교회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그 후로 국내 그리스도교 미술의 발전은 새로운 안목과 체험을 지닌 패기에 찬 젊은 작가들에 의해 그 깊이와 폭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스도교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토착화 내지 한국화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우리의 전통적 요소가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신학계에도 토착화 바람이 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토착화 요청에 정신적 거름이 됐다.

 복음의 진리를 한국인의 종교 심성, 사고방식, 정감과 미의식, 조형감각에 상응하는 양식으로 조형 언어화하는 작업은 국내 그리스도교 미술을 위한 권고 사항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임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토착화 작업은 철저히 `여기서 지금`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장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그리스도교 미술의 탄생은 먼저 가장 한국화된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가장 한국적인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혹은 복음 정신이 가장 무르익은 한국 땅에서 가능한 일이 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삶의 터전에서 숨 쉬며 투쟁하고 고민하고 감사하며 희망하는 진실된 작가를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가장 민족적이고 독창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괴테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화되지 않은 그리스도교 미술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상실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무엇이 한국적이냐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겠지만 이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시대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작가의 진실을 통해 드러난 예술은 이미 한국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술에서의 토착화 단계는 모방과 모색의 단계를 넘어 창조의 단계에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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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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