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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 <6> 희망의 귀환- 희망을 부르면 희망은 내게 온다

약속의 주님 붙잡고 희망을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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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강의 주제는 요즘 특히 귀한 단어 `희망`이다. 희망은 두 가지 방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밖에서 온다. 경기가 좋다거나 선교가 잘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희망은 들쭉날쭉하므로 덤으로 누리면 된다. 그런 희망이 동났을 때에도 희망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희망, 우리가 만들 수 있는 희망을 갈무리해서 그 열매를 나누자는 것이 희망의 귀환 메시지이다.

 인간은 아무리 상황이 악해도 거기서 희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희망 본능이 있는 존재다. 인간은 `지금 여기`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채워갈 수밖에 없다. 어떤 가치를 놓고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는 지점 말이다. 그 바닥에는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심리가 깔렸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고민하고 결단한다. 그 밑에 깔린 것이 희망 본능이다.

 자살할 때에도 따지고 보면 절망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에서 자살하는 것이다. `아, 내가 죽으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어디로 가든 평화로운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는 동경 때문에 자살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자살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희망을 품으면 좋을까.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요즘 희망을 공부하는 중인데 중국의 희망 지혜를 알려 달라고 했더니 `희망재전야상`(希望在田野上)을 적어줬다. 희망은 밭과 들판에 있다는 뜻이다. 땅이 있는데 왜 희망이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것`을 훨씬 저평가한다. 영성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은혜를 깨달아도, 깨달은 것이 받은 것보다는 덜한 것이다. 우리는 물적ㆍ지적ㆍ정신적ㆍ인적 자산과 더불어 기도라는 영적 자원을 갖고 있다.

 이번에 코리안 시리즈를 보면 두산은 대단한 저력을 보여주면서 3승까지 갔다가 더 밀지 못하고 삼성에 또 뒤집혔다. 이것이 진짜 희망 싸움이다. 마지막에 끝까지 살아남는 힘은 결국 희망이다.

 결론은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한다. 객관적으로 옳다. 나는 아무거나 붙잡고 우기라고 권유하고 싶다. `아무거나 붙잡고`는 비신자 버전이다. 우리는 아무거나 붙잡기 전에 잡을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인만이 누리는 특권, 약속의 말씀이다.

 다른 경전에는 약속의 말씀 형태로 주어진 것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붙잡고 늘어질 만큼 힘 있는 약속이 없다. 계룡산에서 기도하는 사람과 우리와 차이가 있다. 계룡산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을(乙)이다. 갑(甲)이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면, 우리가 갑이고 하느님이 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유리하다. `약속의 주님,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제가 환난을 맞이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응답하여 주소서. 제가 입을 크게 벌리겠습니다. 채워 주십시오.`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은 차원이 한 단계 높은 것이다. 죽음을 이긴 희망이 아닌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희망의 권위자가 돼야 한다.

 우선순위의 법칙을 말하겠다. 내 행복의 비밀이다. 무엇이건 우리가 매겨놓은 우선순위에서 0순위 또는 1순위에 있는 것은 `다 쉽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0순위 또는 1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가치를 부여하면 신나는 일이 된다. 모든 일은 가치를 부여하면 달라 보인다. 행복을 누가 누리느냐 하면, 행복에 0순위를 둔 사람이 누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을 누리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속담 하나 `Spero, Spera`. `나는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극적으로 말하면 `나 같은 놈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해라`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은 노숙자이고 듣는 사람은 출근하는 사람이면 어떤가. `어디서 잤어? 뭐 먹었어? 직장 있지? 그래도 나는 희망으로 살아. 인생 뭐 있어. 내가 희망이 없으면 진작 죽었지. 당신도 희망을 품어 보시게. 나도 희망합니다. 당신도 희망하세요.` 이 응원이 서로 부추겨주고 도와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리=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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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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