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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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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되어 섬기고, 목숨 바치고…
예수님 삶, ‘진정한 리더십’ 표본

5. 세 번째 수난 예고 (10, 32~45)

예루살렘 상경기 안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세 번에 걸쳐 실려 있다. 각각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제자들의 몰이해, 그리스도론과 제자직분에 대한 가르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행선지를 잃을세라 간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점진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셋째 수난 예고 (32~34절)

예수님과 열두 제자, 그 밖의 다른 일행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도 그 일행과 함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비장하다. 죽음의 장소를 향해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으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마지못해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 일행의 태도가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 당신께 닥칠 일들을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회의 중심 세력인 수석 사제(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들(로마인 빌라도)에게 넘겨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하여 놓은 듯 셋째 수난 예고는 다른 두 예고보다 명확하고 상세하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 (35~40절)

앞서 두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왔던 서열 다툼이(9, 34)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으로 더욱 실감나게 부각된다. 아마도 이 논쟁은 예수님의 추종자들 사이에 큰 쟁점으로 떠올랐던 문제인 것 같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때에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스승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날을 은근히 기대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좌하겠다는 뜻은 좋으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느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교육 방식으로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신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39b~40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주권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므로 누가 오른쪽 혹은 왼쪽 자리를 차지할지 논할 바가 아니다.

잔과 세례는 죽음을 강력히 시사하는데, 내용으로 보아 훗날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한 다음에 어느 전승자에 의해 덧붙여진 말인 것 같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 (41~45절)

야고보와 요한의 말에 불쾌해 하는 다른 열 제자를 향해 예수님의 리더십 강의가 펼쳐진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지만, 하느님 나라의 통치는 오히려 높은 사람이 종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슨 역설적인 가르침인가?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45절)

예수님의 죽음 해석의 배경에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신비로운 인물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 네 편(이사 42, 1~9; 49, 1~7; 50, 4~9; 52, 13~53, 12)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종’에 나오는 인물로 이해했던 것 같다.(사도 8, 26~40 참조)

특히 주님의 종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목숨을 바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은 ‘주님의 종’의 죽음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온 인류’로 확대해석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죄행위로 본 것이다.

과거 노예나 포로를 해방하여 양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몸값(贖錢)을 치뤄 속량(贖良)을 해야 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대속죄적인 죽음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평생 몸을 낮추어 봉사의 삶을 사시다가 마침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심으로써 그 사명을 완수하신 것이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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