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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37)

마음 목숨 정신 다해 하느님 사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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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에 대한 대담(12, 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멋진 답을 하실 수 있었는지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이번에도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을 시켜 질문을 하게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껏 치켜세운 후,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바치지 말아야 하는지 묻는다.(14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간파하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b절)며 정곡을 찌르신다. 그 질문에는 함정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식민 통치자인 로마제국에 주민세(인두세)를, 그것도 꼭 로마 은화 데나리온으로 바쳐야 했는데, 화폐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황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존칭)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란 말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서기 6년 갈릴래아 출신 유다를 중심으로 열혈당을 결성하여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하려고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주민세를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신다면 민족 배반자로 낙인찍힐 수가 있었고, 주민세를 바쳐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신다면 로마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당장 고발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며 유다인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시키신다. 유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폐에 황제의 흉상이 새겨졌기 때문에 ‘황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은화를 황제에게 바쳐 마땅하다. 이로써, 황제의 권력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라는 뜻이 은연중에 표현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7b절)는 말씀은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 대목은 무엇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실천을 달리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은(창세 1, 27)은 ‘하느님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 30)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황제에 대한 충성과 하느님께 대한 충성은 절대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부활에 대한 논쟁(12, 18~27)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에 대한 논쟁을 걸어온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바리사이와의 논쟁이 나오는데, 부활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바리사이들도 부활을 믿고 있었기에 예외적으로 사두가이와의 논쟁이 다루어진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기에 죽은이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수혼법(嫂婚法)을 논거로(신명 25 ,5~10)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혼인하였다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19~23절) 후사(後嗣) 없이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과 혼인하여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수혼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그 예가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도 종종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부모님 나이보다 훨씬 늙은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혹은 ‘재혼한 경우 이전의 배우자와 어떤 관계로 만나게 될까’ 하는 등등.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우리 중에 아무도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없지만, 부활 후의 세상은 이승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 없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가 될 터이니 이 세상에서의 존재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12, 26b~27)라는 말씀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 인간과의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선언한다.

그분을 섬긴 믿음의 성조들은 하느님과 함께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계실 것이고 장차 부활해서는 더욱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 바로 이것이 부활신앙이 아니겠는가?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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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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