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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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11)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야말로 삶의 충만함 누릴 수 있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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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심(마르 3, 1~6)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논쟁사화를 마감하는 이 다섯 번째 이야기는 본래 앞뒤 문맥과 상관 없이 전해오던 치유사화였으나, 이 자리에 배치되어 적수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것으로(6절) 예수님의 활약상을 마무리한다. 이야기의 전개는 치유이적사화의 전형적인 양식에 따라, ① 상황묘사(1~4절), ② 기적적 치유(5a절), ③ 치유실증(5b절), ④ 목격자들의 반응(6절) 순으로 진행된다. 파격적인 점은 치유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2, 4절), 목격자들의 감탄 대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는 것이다.

유다교의 법해석으로도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일지라도 목숨을 구해야지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병자까지도 고쳐주는 선행을 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석하신다.

사실 안식일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전인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형편이 좋은 기관부터 주5일제를 실시하여 가고 있는 추세지만, 가난했던 시절에는 아예 휴일은 학교나 관공서에서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삼천년도 훨씬 전인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안식일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기억하지만 머슴에겐 휴식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종은 그저 일만 부려먹으면 그만이지 인권이니 쉼이니 하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휴식의 정당성이 부여된 것은 하느님 안에서 만인이 평등하고 하느님만이 당신 백성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실로 엄청난 해방과 구원의 체험이었다. 그러니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선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이 있어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칠 년에 한 번 안식년이 있어 땅까지도 쉴 수 있고, 칠 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는 모든 빚이 탕감되어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인간에게는 사용권만 있지 소유권은 없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피치못해 일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일의 법정신을 회복하여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시간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 일주일에 하루 내어놓기도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따로 웰빙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안식일만 잘 지켜도 우리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야말로 생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III.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활동(3, 7~8, 26)

앞서(1, 16~3, 6)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위에 있어 권위와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이 간략하게 제시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활동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예수님께서 앞으로 고통을 받으시고 분열과 적대를 가져오리라는 점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1.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 7~12 호숫가의 치유)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각지에서 군중이 모여든다. 갈릴래아를 거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는 남쪽에, 요르단 강 건너편은 동쪽에, 티로와 시돈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이 집약문으로 소개되면서,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집결하시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치유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7절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는 구절은 앞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1, 35)는 장면을 상기시키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있어 제자들과 동행하며 동고동락하실 것이다(3, 13; 4, 10. 34; 6, 1).

11절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마르코 복음 서두의 그리스도론적 주제(1, 1)를 상기시키지만, 다시한번 함구령(12절)을 발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까지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귀신들이나 치유된 이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당부하신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6-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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