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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13)

하느님의 뜻 제대로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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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엘제불 논쟁과 예수님의 참가족 (마르 3, 20~35)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느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느니 하며 시비를 거는 논쟁사화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척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참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야기 사이에 끼어서 나온다.

이러한 문체는 마르코가 자주 애용하는 기법으로(2, 1~12. 23~28; 5, 21~43; 10, 13~16; 11, 12~21; 14, 1~11), 마치 샌드위치처럼 상황어- 상황묘사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을 맺음- 를 양분하고 그 사이에 삽입문을 집어넣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원래는 상관이 없었을 두 가지 이야기를 한 데 묶어 같은 대목(pericope) 안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는 누구인가’하는 그리스도론 주제와 ‘예수의 참제자는 누구인가’라는 제자론 주제를 전략적으로 통합시켜 ‘예수님의 참가족’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악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치유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갈라짐 없는 하느님 집안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제자직의 본질은 혈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는가에 있는 것이고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다. 그러면, 편의상 이 대목을 다시 둘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하겠다.

베엘제불 논쟁(3, 22~30)

이해하기 좀 까다로운 본문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다섯 가지 전승을 순차적으로 살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비난한다(22a절).

2. 또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축출한 사실을 두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쫓아냈다고 모함한다(22b절).

3. 예수님께서 “한 나라이든 한 집안이든 갈라서면 망하기 마련이다”라는 상징어(24~25절)를 사탄의 조직에 적용하여(23. 26절) 적수들을 반박하신다.

4. 예수님(=더 힘센 이)께서 부마자(=재물)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이나 귀신(=힘센 자)을 묶어 놓아야 한다고 당신의 구마행위를 상징적으로 설명하신다(27절).

5.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독성죄를 짓게 되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예수님의 적수들이 예수님을 비방하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승에서 활약하실 때 그분을 불신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이제 성령이 작용하는 초대교회의 선포를 불신한다면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시대(=교회의 시대)가 예수 시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정양모,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53쪽, 각주㉩).

예수님의 참가족(3, 20~21. 31~35)

예수님께서 어느 집- 아마도 베드로의 집(1, 29; 2, 1. 15 참조)-으로 가셨는데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 20).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데,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이 났던 것이다(21절). 이야기는 31절로 건너뛰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혈연 가족을 넘어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을 이루셨다. 이들은 하느님에 의하여 자기 삶이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들, 종말론적 전망을 가지고 ‘하느님 백성’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단 본격적인 제자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느님 나라로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성모님을 격하시키려는 사람들이 종종 이 대목을 이용하여 “이거 봐라”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가족 관계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지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족 관계도 혈연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 가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할 때 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최혜영 수녀 (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6-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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