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편안한 꿈CUM _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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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현존하는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 Major Op.73 ‘Emperor’)를 꼽는다. 여기서 ‘황제’는 위풍당당한 곡 분위기에 착안되어 붙여진 것이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독창적 시도가 돋보이는 1악장은 오케스트라와의 강력하고 장대한 대화로 진행되며, 2악장은 느리고 온화하게 사색하듯 흐른다. 바로 이어 연주되는 3악장은 그 시작부터 독창적이다. 피아노와 관현악이 박진감 넘치는 빠른 템포로, 역동적으로 협주한다.
대학 재학 시절의 일이다. 음악대학 과정에는 학기마다 연주학점이 필수이다. 전공 학과 전체 학생이 각자 무대 위에 서서 그동안 연습한 곡을 연주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2학년 그날 무대 위에 서야 했다. 그런데 무대에 서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열심히 준비한 곡이었지만 연주 당일 망쳐버렸다. 나의 노력과 연습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민망하고 속상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느리고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 누르고 있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연주는 한번 망치면 되돌릴 수 없다. 새로운 종이에 다시 고쳐 적을 수 있는 시인이 되었어야 했나. 새로운 종이에 다시 고쳐 그릴 수 있는 미술을 배웠어야 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음악공부한 것을 후회하며 한참을 울었다.
그때였다. 라디오 속 베토벤의 음악은 3악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빠르고 힘찬 피아노 선율 앞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3악장에서 뿜어 나오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선율 앞에 좌절과 실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음악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주님께 약속한 처음의 목표가 떠올랐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렇게 나를 다시 힘찬 도전의 길로 이끌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단순한 모티브가 곡 전체에 지배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편안하고 길고 느리게 감정선을 계속 유지토록 하고 더욱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심장이 뜨거워져 눈물로 분출시키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때는 빠르고 역동적이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휘몰아쳐 온다. 강력하고 극적으로 어디론가 향하게 한다. 음악이 흐르는 시간에도 그곳에 머물러 있기보다 계속해서 전진하게 하고, 음악이 끝난 후에는 역동적인 충만함으로 이끈다.
그래서였을까, 연주를 망친 그날,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나는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희망을 품었고 목적의식을 되찾았다. 음악을 향한 목적의식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베토벤 음악의 힘이다.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내 영혼이 나의 주님을 노래하길 기도한다. 그날 나를 다시 일깨워준 베토벤께 감사드린다.
글 _ 김화수 (유스티나, 수원교구 분당구미동본당)
작곡과 바이올린을 전공하였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앙상블 '보비스 꿈'(vobis cum)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 중이며, 수원교구 분당성루카본당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