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교회 대표하는 가톨릭 미디어
1969년 4월 단파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
국내 방송 Veritas 846과 RVA 나눠 운영
필리핀 현대사 속 진실을 전한 목소리
민주화 혁명 때 비폭력 저항 호소 방송
독재 정권에 저항해 막사이사이상 수상
필리핀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퀘손시티에 본부를 둔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Radio Veritas Asia, 이하 RVA)’. RVA는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이자 ‘아시아의 선교사’로 불려 온 아시아의 상징적인 가톨릭 미디어다. 1969년 단파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해 인터넷 시대를 거치면서 2018년 웹 스트리밍과 SNS 중심의 디지털 미디어로 전환하기까지, 형태는 바뀌었지만 아시아 각 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은 한결같다. ‘VERITAS’는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에 따라 RVA는 아시아 대륙 전역에 진실을 말하며 진리를 일깨우는 가톨릭 미디어의 여정을 걸어왔다. 본지 기획 ‘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의 시작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는 미디어 RVA를 방문했다.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RVA를 방문해 ‘아시아인에게 보내는 라디오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RVA 50년사
RVA 태동과 설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아시아엔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중국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섰고,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 끝에 분단됐다.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곳곳에서도 이념 갈등이 격화했다. 공산주의 이념이 확산하면서 여러 지역 교회가 탄압을 받았고 종교의 자유가 제한됐다. 선교사와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 아시아와 호주 주교들은 1958년 필리핀 산토 토마스대에 모였다. 이념과 국경·언어의 장벽을 넘어 진리를 전파하고, 흩어진 교회들을 하나로 연결할 매체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며 아시아를 위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논의했다.
교황청도 아시아 주교들의 뜻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현실은 척박했다. 방송국을 꾸릴 자금·부지·기술·경험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주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믿으며 길을 찾아 나갔다. 아시아 주교들의 방송국 설립 움직임에 독일 가톨릭교회와 정부가 재정 지원을 약속하면서 설립 안이 구체화됐다. 여기에 교황청과 아시아 각국 교회의 재정 지원이 더해져 논의가 시작된 지 11년 만인 1969년 4월 ‘라디오 베리타스’는 첫 전파를 쏘아 올렸다. 라디오 베리타스로 출발한 RVA는 1990년대부터 필리핀 국내 방송 Veritas 846과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RVA로 나눠 운영되고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개국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교황은 RVA가 ‘베리타스’라는 이름처럼 “진리에 새롭고 강력한 목소리를 주는 매체”가 되기를 당부했다. 이듬해인 1970년 필리핀을 처음 사목방문한 교황은 RVA를 직접 찾아 ‘아시아인에게 보내는 라디오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황은 이 메시지를 통해 RVA가 단순한 방송국을 넘어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 가난과 불평등의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의 통로임을 분명히 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RVA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RVA 50년사
국경·언론 탄압의 벽 넘어 진리 전달
개국 당시 RVA는 영어·베트남어·필리핀어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어, 싱할라어(스리랑카), 텔루구어(인도), 타밀어(인도·스리랑카), 미얀마어, 벵골어(방글라데시), 우르두어(파키스탄), 카렌어·카친어(미얀마) 등 여러 민족과 지역 언어로 방송 영역을 넓혀갔다. 현재 RVA는 아시아 7개국에 지부를 두고 21개 언어로 보편 및 아시아 교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RVA의 현지어 방송은 단순히 복음 확장의 전략이 아니었다. 전례 안에서 모국어 사용의 길을 열고, 복음이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뿌리내리도록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정신을 따르는 실천이었다. RVA 덕분에 아시아 신자들은 자신의 언어로 복음과 교회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소수민족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가 아시아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존중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제가 부족하거나 교회 활동이 제한된 지역, 정치적 상황으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지역에 사는 신자들에게 RVA는 복음을 접하는 주요 창구였다. 이들에게 RVA는 사제이자 교리교사이자 선교사였다. RVA는 매일 복음 묵상, 미사 생중계, 교회 뉴스와 교리 및 전례 교육, 신앙 상담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더불어 종교 간 대화, 생태, 평화, 인권 등 아시아 사회가 마주한 문제도 각 지역 교회 언어로 풀어내며 복음을 아시아인의 삶 한가운데서 해석하고 전해왔다.
1994년 4월 11일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은경축 기념 표지석 제막식에서 RVA 총책임자 에를린다 소 여사가 축사를 하고 있다.RVA 50년사
필리핀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에 RVA는 진실을 전하는 목소리였다. RVA 총괄 책임자 펠마 피엘(Felma Fiel, 필리핀, 성령선교수도회) 신부는 “1986년 ‘피플 파워’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 당시 RVA는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매체였다”고 말했다. 당시 마닐라대교구장이던 하이메 신 추기경은 RVA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폭력이 아닌 평화로운 저항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이에 응답하며 거리로 나와 유혈 사태 없이 민주화를 이뤄냈다.
독재 정권은 RVA의 방송을 막기 위해 송신소를 공격했지만, RVA는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본부 박물관에 전시된 폭격당한 송신기 파편은 가톨릭 미디어가 교회 소식 전달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인간 존엄을 지키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RVA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디지털로 변신한 RVA “WYD 때 ‘신앙의 눈’ 되겠다”
펠마 피엘 신부가 2019년 RVA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포토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과감한 전환
2007년 녹음·편집 체계 및 자료 디지털화
49년 이어온 단파 라디오 송출 중단
젊은 세대 참여 유도에 주력
단편영화 공모전에 80편 넘는 작품 응모
서울 WYD 기간 통신원 42명 파견 준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발 맞춰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다양한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복음을 접하는 ‘유일한 창구’로서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때 필리핀 본부에는 300명에 달하는 직원과 제작자들이 상주했다. 각 민족 언어를 담당하는 이들이 RVA 본부로 파견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RVA 국장 존 미 쉔(John Mi Shen) 신부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교회 미디어 종사자들이 모인 RVA는 작은 아시아 교회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터넷과 기술의 발달에 RVA도 적응해야 했다. RVA는 2007년 아날로그 녹음과 편집 체계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했다. 디지털화로 RVA는 비용을 절감하면서 효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 테이프에 보관하던 강론·교리·성경 강의·성가들도 디지털 자료로 변환했다.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본부 내에 있는 박물관. 반세기 넘는 RVA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RVA 50년사
2018년에는 50년 가까이 이어온 단파 라디오 송출을 중단했다. 결정 과정까지 반대가 거셌다. 아시아 주교단 사이에서도 “굳이 없애야 하느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오랫동안 라디오로 RVA를 들어온 청취자들은 “우리를 버리는 것이냐”고 항의했다. 이들에겐 신앙의 추억과 기억이 담긴 매체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쉔 신부는 “방송 종료를 받아들이지 못한 청취자들에게 그들이 좋아했던 강론과 강의를 디지털 기기에 담아 선물하기도 했다”면서 “우리가 기존 방송과 청취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임을 알리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디지털 전환은 RVA 운영 방식도 바꿨다. 탈중심화 전략에 따라 각 언어 담당자는 현지에서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본부는 이를 연결해 확산하는 허브 역할을 맡게 됐다. 필리핀 본부와 21개 언어 지부 담당자는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 회의를 통해 서로의 상황과 계획을 나누고 공통 주제와 보도 방향을 조율한다. 각 언어 방송은 오늘날 인터넷 홈페이지를 기반으로 페이스북·유튜브·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피엘 신부는 “아시아 곳곳에 퍼져 있는 RVA 지부는 현지 교회의 눈과 귀와 입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지역 교회만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RVA 소속 기자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RVA 50년사
청년과 만나는 새로운 방식
RVA는 아시아 지역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10주년을 기념하며 국제 단편영화 공모전을 개최했다. 생태 회심과 신앙 실천을 주제로 한 공모전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 속에 80편이 넘는 작품이 응모했다. 특히 AI와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10~20대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올해 1월 수상작이 발표됐고, 1~3위는 각각 태국·필리핀·인도팀에 돌아갔다. 각 작품은 RVA 홈페이지(www.rvasia.org/laudato-si-film-making-contes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쉔 신부는 “현지 언어로 제작된 작품도 AI 기술로 영어 번역이 가능했기에 작품의 주제가 전달되는 데엔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현대 기술 덕분에 더 많은 이가 참여하고 「찬미받으소서」 메시지를 더 널리 알릴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아시아주교회의연합 사회홍보위원회와 공동주최한 국제 단편영화 공모전은 아시아 주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RVA는 앞으로도 젊은 세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제 RVA의 시선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로 향하고 있다. 이미 서울 WYD에 21개 언어 담당자 전원(42명)을 파견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WYD는 RVA가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라는 사명을 새롭게 실천할 장이기 때문이다. 쉔 신부는 각 언어 담당자를 ‘42명의 통신원’이 아닌 ‘42쌍의 눈’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이야말로 아시아의 시각으로 WYD의 현장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렌즈라는 뜻이다. 쉔 신부는 “공식 보도자료나 일반 언론에서는 다룰 수 없는 아시아 교회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RVA는 아시아 교회가 자기 언어로 증언하는 기쁜 소식을 연결하는 허브로 거듭났다. 반세기 전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자들에게 다가갔던 RVA는 이제 디지털 공간에서 아시아 청년과 지역 교회, 소수 민족과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어 가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터뷰] RVA 라디오 듣고 자란 꼬마, 콘텐츠 총괄 사제가 되다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국장 존 미 쉔 신부.
RVA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며 아시아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왔다. RVA 국장 존 미 쉔(John Mi Shen) 신부는 “아시아 교회 소식을 알려면 RVA를 보면 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RVA 키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인 RVA를 통해 강론과 교리 강의를 들으며 자랐다. 2010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쉔 신부는 “할아버지께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RVA에 주파수를 맞추셨다”면서 “매일 가족과 함께 RVA 방송을 들으며 신앙을 키워갔다”고 회고했다. 쉔 신부는 필리핀 산토 토마스대에서 공부하던 20대 때 RVA 본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 라디오로 듣던 방송국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꿈을 이룬 것 같았습니다.”
그는 2004부터 RVA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중국어 담당자로 일을 시작해 지금은 21개 언어 콘텐츠를 총괄하고 있다. 할아버지 곁에서 RVA 방송을 듣던 어린 꼬마가 이제는 RVA에서 아시아 교회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사제가 된 것이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018년 단파 라디오 방송을 종료하던 때였다. 디지털 전환은 새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오랫동안 RVA를 청취해온 이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쉔 신부는 “RVA의 역사와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쉔 신부는 디지털 세계를 새로운 선교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거짓 뉴스가 넘쳐나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을수록 교회 미디어가 더 적극적으로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디지털 세계 역시 현실 세계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다”며 “좋은 콘텐츠가 그 공간을 채우면 하느님의 현존도 그 안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를 대표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성찰합니다. 다른 가톨릭 미디어에서도 접할 수 있는 행사 기사나 주교의 발표문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RVA만이 전할 수 있는 아시아 교회의 삶과 신앙을 찾아내고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이니까요. 서품식이 언제 어디서 열렸다는 보도보다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해 그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를 다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RVA의 21개 언어는 아시아 교회의 다양한 목소리다. 쉔 신부는 “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면서 “다종교·다문화 사회에서 RVA가 전하는 내용은 일방적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사랑·진리·용서의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이를 위한 분이죠. 우리가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아시아의 다양성은 걸림돌이나 어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아름다움은 21개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RVA 안에서 매일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