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문경본당 정리공소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정리2길 46-6에 자리하고 있다. 문경 시내와 가은읍 중간 구릉지 산골 마을 한쪽에 소박하게 터 잡고 있다.
정리(鼎里)는 한자 뜻풀이 그대로 ‘솥마을’ ‘솥골’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성주산과 능곡산, 주지봉이 단단한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솥을 떠받치는 세 개의 다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솥골은 문경 정리 외에도 강원도 홍천군 서면 굴업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경북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경북 예천읍 생천리, 경북 청도군 송읍리, 경남 사천시 곤양면 서정리, 경남 고성군 동외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에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산줄기에 자리한다.
정리공소 제단. 나무 마룻바닥에 단층 하나로 회중석과 구분해 놓았고, 제대와 제단 십자가, 성모상으로 꾸며져 있다.
왜관감목대리구가 북부 지역 본당 사목
남자 수도회로 1909년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연합회는 서울 백동수도원, 덕원·연길수도원을 거쳐 1952년 왜관에 정착했다. 선교수도회인 상트 오틸리엔연합회는 당시 사제가 부족했던 대구대목구의 위임을 받아 김천·상주·함창·점촌 등 왜관 북부 지역 본당을 사목했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은 1956년 3월 ‘왜관감목대리구’를 설정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이때부터 1986년 왜관감목대리구를 해체하고 관할 모든 본당을 대구대교구에 이관할 때까지 30년간 20개 본당을 신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왜관감목대리구의 신설 본당 중 하나가 1958년 12월 7일 설립한 문경본당이다. 가은본당 주임 에르네스토 지베르츠(한국명 지인수) 신부가 초대 주임을 겸임했다. 지 신부는 격동의 삶을 살았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해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 사제품을 받은 직후 함경도 덕원수도원 선교사로 파견돼 1935년 1월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원산본당 보좌를 거쳐 고아·덕원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1949년 5월 10일 북한 공산당에 의해 덕원수도원이 폐쇄되고 모든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가 체포됐을 때 그도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는 근 5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초를 겪다 1954년 1월 독일로 송환됐다. 이후 2년 뒤인 1956년 11월 옥사덕 수용소에서 함께 박해를 받았던 요셉 쳉글라인 신부와 다시 한국으로 파견됐다.
지 신부는 1950년 중반 문경과 가은 지역에 가톨릭 신앙공동체의 기틀을 닦은 사목자다. 그는 문경과 가은 두 본당 주임을 겸하면서 3년 동안 처음 1년 반은 오토바이로, 나머지 1년 반은 낡은 지프로 주일마다 시계추처럼 두 성당과 공소를 오갔다.
정리공소 내부. 시멘트 벽돌을 쌓아 회반죽으로 미장하고 수성 도장으로 마감했다. 또 벽마다 창을 내 채광이 잘 되게 해 놓았다.
정리공소 외부 성모상. 2004년 문경성당에 있던 성모상을 옮겨 왔다.
1968년 교우들의 손으로 봉헌한 정리공소
정리공소는 1963년 설립됐다. 안동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안동가톨릭사학-공소 교회와 교구 사제단」과 안동교구 공소 탐방 ‘틔움’도 똑같이 설립 연도를 1963년이라 한다. 하지만 ‘틔움’에는 “1963년 외국 신부님이 계실 때 설립되었습니다”라고 한다. 지인수 신부는 1962년 1월 26일까지 문경본당에서 사목했다. 1963년에는 연길교구 출신 이태준(야고보) 신부가 제2대 문경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리공소가 지 신부가 있을 때 설립했으면 1962년이고, 1963년에 설립됐다면 이태준 신부로 바로잡아야 한다.
함창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권영철(베드로)씨가 전교에 힘써 적지 않은 주민을 입교시켰다. 권씨는 이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했고, 판공 때에는 본당 사제가 방문해 한 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정리공소는 1967년 왜관수도원과 문경본당의 도움으로 대지를 마련해 공사를 시작, 1968년 지금의 공소를 봉헌했다. 공사 시작에서 완공까지 희생적인 노동 봉사는 공소 교우들의 몫이었다.
정리공소는 문경성당을 설계한 알빈 슈미트(한국명 안경빈) 신부의 작품이다. 「건축가 알빈 신부」에는 정리공소 설계가 1966년에 완성된 것으로 나온다.(177쪽 참조) 건축 대지를 마련하기도 전에 설계가 나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부분도 안동교구나 문경본당 측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이 시기 왜관수도원 선교사들과 왜관감목대리구 사목자들은 유교와 불교 색이 강한 경상도 지역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
미술과 교회 건축을 공부한 알빈 신부는 종탑 꼭대기에 십자가와 성령 강림을 상징하는 비둘기상을 설치해 이곳이 가톨릭교회임을 알렸지만, 마을 풍경을 해치는 위압적인 건축물은 절대 짓지 않았다. 오히려 종탑만 살짝 드러날 뿐 겸손한 형태의 소박한 건축물로 성당을 지었다. 교회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집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 견해를 모든 교회 건축물 설계에 녹여 놓았다.
알빈 신부 역시 지 신부와 똑같은 경험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는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1937년 연길수도원으로 파견돼 만주 북간도 연길교구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 또한 1946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연길교구와 연길수도원이 폐쇄됐을 때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노동수용소 생활을 했다. 1949년 그는 수도회 형제들과 함께 독일로 추방됐고, 1961년 다시 한국으로 왔다.
알빈 신부는 늘 궁핍하게 살아가던 당시 한국의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튼튼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데 몰두했다. 그래서 그는 성당과 공소 등 교회 건축물을 지을 때면 일반적으로 시멘트 벽돌을 쌓아 회반죽으로 미장하고 수성 도장으로 마감했다. 또 네 벽면 모두에 창을 내어 채광을 밝게 했다.
정리공소 나르텍스 공간. 알빈 신부는 공소 입구 문 앞에 나르텍스 공간을 내어 종탑과 연결해 놓았다.
알빈 신부의 설계 특징 고스란히 담아
정리공소 역시 알빈 신부의 설계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회 건축물이다. 공소는 마을 한쪽 높은 구릉 위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구조는 일자형 강당식으로 시멘트 벽돌집으로 단순하게 지어졌다. 내부는 회반죽으로 미장하고 수성 도료로 마감했다. 벽에도 커다란 창문들이 나 있다.
나무 마룻바닥에 단층 하나로 제단과 회중석을 구분했다. 제대 앞면에는 성체성사 제정을 기념하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 장면이 조각돼 있다. 제단 십자가 옆에는 ‘루르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공소 건물 입구와 종탑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성당 문과 그 앞의 회랑식 공간을 교회 건축 용어로 ‘나르텍스’(narthex)라 한다. 나르텍스는 거룩한 공간과 세속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어둡게 꾸민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공간을 지나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알빈 신부는 정리공소 입구에 벽을 덧대 나르텍스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종탑을 세웠다. 그리고 종탑 꼭대기에는 작은 십자가를 장식했다. 더불어 나르텍스 벽에는 이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정화의 빛’을 비춰 주시는 듯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정사각형의 틈들을 내놓았다.
정리공소는 문경 지역 복음을 전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선교사들과 왜관감목대리구 사목자들의 선교 열정을 되새겨볼 수 있는 소박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