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건강 염려증 환자의 묘비석에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써 있었다고 한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가 맞은 것일까? 그의 염려대로 그는 죽을병에 걸렸던 것일까? 아니면 의심으로 마음에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몸이 상한 것일까?
유학시절, 큰 의심에 빠진 적이 있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 염려증이었다. 늘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는데, 동료들이 말을 건넨다. “아직도 힘들어?” 그들은 나를 우울감에서 꺼내주고자 했는데, 나는 의심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저들은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지도 못해.’ 의심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든 이가 경험하듯, 인간은 의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의심은 굉장한 힘을 갖고 인간을 지배한다. 의심하면 할수록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며, 의심하는 자신과 싸울수록 의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더 깊은 의심에 빠진다. 그러나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내는 분이신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의심을 마주하고 넘어서도록 이끌어 주신다.
의심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의심이 있는가 하면, 인간에 대해 신뢰를 두지 못하는 의심이 있고, 마지막으로 존재의 근거에 대한 의심이 있다. 가장 큰 의심은 바로 존재 근거에 대한 의심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거는 확실한가? 나를 지켜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죽음과 함께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기에 의심은 늘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존재한다. 이는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큰 시련이 닥칠 때, 환난으로 자신감과 확신이 사라질 때, 병이나 죽음의 위협으로 괴로울 때, 암울한 내일밖에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이 저만치 물러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이 의심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주님께서 나를 끝까지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실 것이란 희망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결국 의심도 희망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도 경험하지 않나.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을 찾으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희망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 말고 모든 근심 걱정을 맡겨드리자. 모든 것을 맡겨드림이 가난한 마음이라면, 희망은 결국 마음의 가난에 있지 않을까?
성지순례단 재모임에서 한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다. “순례 내내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어요. 그런데 아시시를 순례하면서, 클라라 성녀께서 선종하신 침대 앞에 서면서, 소박하게 초 하나 켜져 있고 꽃 한 송이 놓여 있는 그 침대 앞에 서면서, 그분의 소박한 선종에서, 가난한 침실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희망이 피어오름을 느꼈습니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 것에서 희망이 움튼다는 말씀이었다.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아닐지. 이처럼 가난이 다시 한번 우리의 어두운 밤길을 밝혀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난이 희망이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