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억 속 노래를 꺼내어 불러보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쁜 꽃들이 모여 사는 꽃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꽃들도 있지만, 한 편에는 자갈도, 잡초도, 흙덩이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적당한 거리에서는 아름답게 보이는 꽃밭에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이런저런 흉하게 보이는 것들이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꽃밭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갈이나 잡초 또는 흙덩이와 같은 상처와 고통 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가 보아도 아름다울 꽃밭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다운 꽃밭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꽃밭 인생살이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초대받아 음식을 잡수시는 상황에서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오히려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8-10 참조)라고 하십니다.
사회에서 어떤 행사를 하게 되면,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중요도가 결정되고, 거기에 따른 의전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누가 어디에 앉고, 어떤 순서로 연설하고, 동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적합한 예우를 갖추는 일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가 스스로 그러한 예우를 요청한다거나 윗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다툰다면 그것은 그리 아름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자리와 의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 역시 행사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또는 어떤 기념을 위해 사진을 촬영할 때마다 중앙에 자리하기를 요청받곤 합니다. 어떤 행사의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모든 행사 때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쪽 편에 자연스럽게 무리의 한 사람으로 자리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 마음 안에 작동해서 그런가 봅니다.
어느 자리에 위치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한 존중과 중요성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중요하다 여겨지고 존중받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자리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리나 의전과 같은 외적인 면보다 영적인 면을 더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초대한 이’에 대해서도 말씀을 주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제가 주로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유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라는 말씀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분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어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살기에는 아직은 제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그분들을 한 식탁에 초대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분들 상황에 관해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고 걸어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해 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행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똑같이 행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답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직접 받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올 수도 있고,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보답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한 이’ 또는 ‘초대받은 이’로서 각자의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어 가도록 합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