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에게 돌아서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정에 얽매이지 말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두 번째 조건에서 설명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를 각자의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역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각자가 똑같이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듣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그 길을 따르려면 당연히 가족을 떠나야 할 것이고 목숨에 대한 미련마저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가족과 목숨까지 포기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따르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이를 더 강조하십니다. 탑을 세우려고 하면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를 따져야 하고, 전쟁을 하려고 해도 먼저 승산을 따져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먼저 그분을 끝까지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란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재산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정, 목숨도 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라고 보면 그 모두에 대한 미련을 끊고 내려놓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이 바라시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지혜 9,14-15)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한계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와 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구원입니다.(지혜 9,17-18 참조) 예수님은 그 구원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똑같은 두려움과 고뇌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반대가 그분께 걸림돌, 즉 당신의 결심을 뒤흔드는 유혹이 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피땀을 흘리는 고뇌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분의 내적 고통은 아마도 숨을 거두시기 전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신 순간까지 이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복음은 인간적인 정과 우리가 가진 재물과 우리의 목숨을 언제나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런 요청을 늘 받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과 선택의 순간, 우리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욕망,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받은 필레몬도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간곡한 요청 앞에서 그런 갈등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감정, 재산의 손해 등을 그는 분명히 이겨내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갈등의 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