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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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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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한 집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어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였는데, 그것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돌아 해고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호구지책을 궁리해 봤지만, 그는 땅을 파기도, 구걸을 하기도 싫었습니다. 사실 고대에 땅을 파는 것은 가장 고된 노예의 일이었고, 집회서는 ‘구걸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라고 합니다.(집회 40,28 참조)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부자에게 빚진 사람들의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해 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의 집에서 쫓겨나면 그들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집에 집사로 재취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집에 맞아들인다’라는 말은 친구로서 머물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집사는 자기가 빚 장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채무자들이 자기들의 입으로 직접 부채 금액을 말하게 합니다.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말이 서로 다른 경우 다툼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이 얼마인지 절대로 묻지 않던 관례를 깬 것입니다. 각각 50에서 20까지 부채가 줄어든 채무자들이 자기 빚이 얼마나 많이 탕감되었는지 실감하여 집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의 결과는 예상 밖으로 나타나 집사는 부자의 신뢰를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주인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것은 그가 어리석어 집사가 자기 몰래 벌인 일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쳐도, 예수님까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하시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수단과 관계없이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말씀처럼 들려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집사가 정말 불의한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이 집사는 불의한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그에게 문제가 된 부분은 횡령이나 절도가 아니라 낭비라는 점을 분명히 합시다. 그래서 그는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해고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조차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소문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정보나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헛소문이 얼마나 무성합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 소문의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집사를 해고하려는 부자의 처사가 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는 집안의 종이 아니라, 부기나 회계에 대해 대부분 사람이 무지하던 시절의 전문 재산관리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살던 어떤 사람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재산을 관리하던 관리인에 관한 기록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재산관리인들은 고용인으로부터 정해진 월급을 따로 받던 것이 아니라, 그가 창출하는 수익의 일부를 보수로 챙겼습니다. 그러니 집사가 부자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감해주는 것이 부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래에서 자신이 받을 몫을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자가 집사를 칭찬한 이유가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채무자가 갚아야 할 빚은 줄어 채무의 상환이 빨라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사실 재물 자체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불의하지는 않습니다. 즉, 재물은 도덕적으로 중립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죠.


이것으로 미루어 오늘 복음에서 불의하다는 말은 도덕적 차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불의하다는 말은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불의한 집사 또한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자녀, 곧 신앙이 없는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 현명하게 대처하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구원을 위해 더욱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위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고 재물을 포기할 줄 압니다. 하물며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재물을 땅의 곳간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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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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