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탄생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일어났다. 빈 외양간·차가운 구유·이름 없는 목동들. 누구의 시선도 머물지 않던 그 가난한 자리에서 하느님은 먼저 머무셨다. OSV
요즘은 가난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져서가 아닐 것이다. 너무 잘 감춰져 있기 때문 아닐까. 카드빚 뒤에 이어지는 소비, 잘 꾸며진 SNS 속 ‘부캐’, 은행대출로 산 번듯한 아파트?. 어쩌면 현대의 가난은 물질의 결핍을 넘어 마음과 관계, 의미의 빈자리로 더 크게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의 형태는 원자화되어 보이지 않는 빈곤으로 흩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의 가난은 더 조용하고, 더 외롭다.
예전의 가난은 달랐다. 옥탑방·달동네·낡은 외투·빈 식탁·거리의 추위·부족한 끼니 등 가난은 눈앞에 있었고, 마주할 기회라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외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보였다’. 지금의 가난은 통계 속에서만 실감 날 때가 많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서 멀어지고, 멀어지기에 쉽게 잊힌다. 때로는 나 자신의 가난조차.
성탄이 다가왔다. 도시는 더 밝은 조명을 켜고, 더 큰 트리와 화려한 음악을 앞세운다. 그러나 정작 그 한가운데 있는 아기 예수님의 ‘가난한 탄생’은 찬란한 불빛 아래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동방 박사들이 별 하나를 따라갔던 그 밤, 어둠 속에서 별빛은 얼마나 또렷하게 빛났을까. 하지만 오늘의 도시 불빛은 너무 화려해, 하늘의 별은 볼 수도 없고 너무 밝아서 오히려 길을 잃을 지경이라는 역설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볼 작은 여유조차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탄생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일어났다. 빈 외양간·차가운 구유·이름 없는 목동들. 누구의 시선도 머물지 않던 그 가난한 자리에서 하느님은 먼저 머무셨다. 그런데 우리는 화려한 장식과 이벤트에 마음을 빼앗겨 그 자리를 찾지 못한다. 성탄의 빛이 너무 환해 정작 성탄의 어둠, 즉 가난과 낮아짐의 자리에는 눈길이 미치지 않는다.
성탄과 세밑을 화려한 ‘이벤트’로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거리 곳곳에서 ‘홀리데이 에디션’이 쏟아지고, 레스토랑 예약은 이미 꽉 찬 채 사람들은 다양한 모임을 계획한다. 어느새 성탄은 신비 앞에 머무는 침묵의 시간이라기보다 분위기에 젖어 ‘기분’을 소비하는 것 같다. 사실 이벤트라는 단어 자체가 잠깐 번쩍이는 장면에 가깝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소비로 유지되는 기분. 잠깐 반짝이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그러나 축제는 다르다. 축제는 공동체의 시간이다. 누군가와 같은 자리에 모여 각자의 삶을 나누고, 흩어진 마음을 다시 꿰매는 자리. 함께 웃고, 함께 머물고, 함께 기억된다. 그래서 축제는 소비가 아니라 관계를 남긴다. 성탄은 원래 그런 축제였다. 화려함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가 모여 만든 가난한 축제. 차가운 바람 스미는 외양간에서 아기가 태어났던 밤, 그곳에는 거창한 조명도, 이벤트 무대도 없었다. 다만 가난한 이들의 따뜻한 체온과 눈빛이 모여 서로를 살리는 공동체의 축제를 이루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가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을 다시 돌아본다. 우리는 과연 그 보이지 않는 가난을 바라볼 눈을 갖고 있는가. 가난이 감춰질 때, 성탄의 본질도 흐려진다. 이벤트만 가득하고, 축제는 사라지고, 공동체성도 희미해진다. 반짝이는 기분만 붙잡은 채 마음 어딘가가 헛헛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각자 마음속의 가난을 용기 있게 바라보라고 초대하는 시간이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무너지는 내 마음의 작은 구유에 예수님이 사랑과 자비로 다시 태어나시기를 기도한다. 내 가난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머무실 때, 성탄은 잠깐 반짝이는 이벤트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축제가 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하나의 별빛이 되어 이웃의 가난을 바라보게 하고 손을 내밀게 하는 진짜 성탄의 축제로 우리 공동체 안에 이어지길 바란다.
<영성이 묻는 안부>
오래전,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가난이 너무 익숙해서 그게 가난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던 때도 있었지요. 그러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난과 부가 나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양극화가 더 뚜렷해졌는데도 정작 가난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카드빚과 SNS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감춰진 채 우리 안의 불안과 외로움만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진 듯합니다.
성탄입니다. 무한한 사랑과 자비이신 하느님께서 쉽게 찢기고 쉽게 쓰러지고 쉽게 상처받는 우리를 품어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은 참으로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때로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을 만큼 나약하고, 나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요. 그런 우리가 어떻게 완전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가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취약한 아기로, 낮고 가난한 자리로. 이 진리는 곧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비롭고 사랑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성탄을 축하합니다!”라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이 한마디에는 “당신의 마음 안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연약한 마음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듯 내가 쉽게 좋아하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에도 이미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는 벅찬 인사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다해, 그리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렇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합니다!”
※ 3년 동안 ‘오늘도, 안녕하세요?’를 연재해주신 김용은 제오르지아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