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유다 문헌에 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첫째, 율법학자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를 때 이스라엘 백성(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레위 22,32; 신명 32,51; 이사 8,13 참조) “너희는 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나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드러나도록,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레위 22,31-32)
둘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완성될 인류 구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뭇 민족이 보는 가운데 주 하느님께서 의로운 판관이며 구원의 완성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스위스교회의 주보 성인 브루더 클라우스(1417~1487)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아인지델른 베네딕도 수도원 성지까지 약 50km를 성지순례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만 봉헌했답니다. 몇 번이나 바쳤을까요? 단 한 번도 못 바쳤다고 합니다.
놀랍지만 당연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다 보면, 그 첫 소절 안에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될 듯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 4,14)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느님께 감히 직접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스 성인은 이런 물음을 놓고 아마도 10시간 묵상으로도 그 오묘한 신비를 한껏 깨닫기에는 결코 흡족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실상 지상 최고의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온 우주 안에 둘도 없이 단 하나뿐인 나를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를 어찌 몇 시간 안에 단 10라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고해성사 보속으로 가끔 “주님의 기도를, 뜻을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한 번 바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시겠습니까?”라고 교우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 매일 합니다”라면서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를 마치 대단치 않은 기도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분들께서는 주님의 기도 봉헌 때마다 에제키엘서 36장에 나오는 구원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분의 축복이 이미 우리 안에서 활짝 피어오르리라 믿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는 날, 성읍들에는 다시 사람이 살고 폐허는 재건되게 하겠다. …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하였던 이 땅이 에덴 정원처럼 되었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에제 36,33-35)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