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줄기 빛 : 여성 ㆍ 생명 ㆍ 사랑
나의 전부라 생각했던 일과 공부를 오직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모두 접고,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을 머리가 아닌 가슴과 몸으로 배우며, 그렇게 1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전업주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10여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깨달은 안타까운 현실은, 내 안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위축감과 사회적 무시 그리고 남편에게서 받은 깊은 모멸감이었음을 참으로 가슴 아프게 고백하고 싶다. 이러한 나의 참담한 개인적 경험이 바로 여성들 전반의 보편적 경험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화만 나면 "밥하고 빨래하고, 애 키우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며…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는 남편의 말에, 내 인격과 삶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깊은 아픔과 상처, `무시`를 느꼈다. 또한 살림하며 살아온 10여 년 세월 동안 지난날 애써 쌓아왔던 학업이나 사회적 능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이 나를 압도하며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하느님 앞에 참된 나를 찾고 싶은 깊은 열망을 느꼈다. 나 역시 그 분 앞에 소중하고 귀한 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4살, 7살 되는 두 아이를 데리고 그간 포기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늦은 나이에 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어렵게 박사 과정 입학 허가서를 받아내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혼자 한국에 남아 생활하던 남편이 많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다시 모든 것을 접고 돌아왔다.
비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접어야 했고, 낯선 타지에서 어린 두 아이와 힘겹게 살며 시댁과 남편 문제로 고통과 아픔의 시간들을 겪어야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아팠던 만큼 더 많은 은총과 사랑으로 채워주셨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겨주셨다.
또다시 몇 년이 흐른 지금,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내게 깊은 확신을 주셨다. 즉,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래서 마치 `생명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이 귀한 하루하루의 시간들 속에서,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온 마음으로 기도하며 밥하고 시장보고 청소하는, 너무 `작고 보잘것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주부로서의 이 모든 일상이 하느님께서 주신 가정이라는 생명체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다시 말해 생명과 직결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귀한 사랑의 소명이라는 것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오직 한정된 시간뿐이라는 것을 그간 치열했던 삶을 통해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지금 내게 주어진 일상의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들을 진정 기쁘게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행하고자 애쓰고 있다.
비록 나를 무참히도 아프게 했지만, 하느님 안에서 조금씩 함께 성장해가는 소중한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직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건강과 시간이 허락되어 있음에 오히려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너무 소박해 눈에 띄지 않는 그러한 주부로서의 나의 일상은 어느덧 내겐 기도가 되고 사랑 그 자체가 되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크고 화려한 것만을 지향하는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성공 지향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 때문에 여성들이 집에서 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은 전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임금 노동으로 그저 `하찮은 일`, `애 낳고 살림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무시되고 폄하되어 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생명을 낳아 키워내는 여성들 자신이나 인류에게 가장 고귀한 창조적 소명인 출산과 양육을 거부하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음을 나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