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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심(아녜스, 서울 여의도동본당)
신문지상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는 유괴라든가 살인 등의 특정한 사건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한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과 함께 질병으로 죽어가는 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대서특필하는 등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으로 인공유산이라는 방법으로 참혹하게 희생되는 생명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수태한 모체의 보호는커녕, 그 모체에 손을 대서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태어나는 한 생명과 모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 합니다. 모체와 태아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자 제왕절개를 하기도 하며 난산으로 질식 상태에 빠진 신생아를 소생시키고자 신생아실의 소아과 의사와 함께 온갖 힘을 다 합니다.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한 신생아의 생명을 건져보려고 밤새도록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무슨 까닭으로 어떤 생명들은 아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없애져야만 하는지요?`, `한 번 대면해 본 일도 없는 모체 내의 태아를 무슨 이유로 없애버려야만 합니까?` "만일 쇠 연장으로 남을 쳐 죽였으면, 그는 살인범이다. 그러므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민수 35,16).
화초나 잡초라면, 필요하고 키우고 싶은 것만을 두고 나머지 것을 뽑아버려도 좋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의 생명`을 `사람`의 뜻에 의해 마음대로 없애버리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불임환자의 경우, "남편이 3대 독자인데…", "남편이 7대 독자인데…" 하며 아기를 갖고 싶어 부부가 합심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생명을 앗아가기는 쉽지만 결코 마음대로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들도, 지켜보는 의사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인공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심이 절정에 이른 이 시대에,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한 노력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자만심에 대해 신중히 뉘우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 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해 물으면 인공유산까지 해 가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 몇 년 더 있다 아기를 낳을 계획이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생식기의 각 부분이 언제 병들어 그 기능을 잃거나 혹은 제거해야 할 경우가 생길지 모르는 데도 말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 불임의 몸이 될지 그 외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어찌 그리도 하느님 앞에서 자신만만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열한 번이나 인공유산을 한 경력으로 그 후 6년 동안 기다려도 원하는 임신이 되지 않아, 아기를 가져 보려고 고심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열 번이 넘도록 생명을 주실 때에는 마다해 중절수술을 하고, 본인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니 그 때에는 꼭 임신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잘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생식기관에 장애가 생겨,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계획을 잘 하려다 뒤늦게 가족계획의 완전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소한 일에는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오히려 큰 일에는 무심해 버리는 일도 있고, 일의 선후를 바꾸어 질서를 깨뜨려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생명에 대한 섭리야말로 우리 인간 세상에서 가장 잘 지켜야 하는 질서체계가 아닐까요?
산과의사로서는 분만에 관여하며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고 위험에 처한 태아 혹은 신생아에게 대세를 주고 기도했으며, 자궁외 임신 등의 환자를 구하는 불가피한 응급수술의 상태에서 태아의 생명에 대해 가톨릭 신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편, 부인과의사로서는 암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을 앞둔 생명에 대해 새로이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국립의료원에서 부인과 의사로 있을 때에 만났던 융모상피암으로 투병하다 선종한 `루치아`씨때문입니다.
장기간 병원을 드나들며 항암 치료를 받던 그녀는 현주소가 청계천 다리 밑이라 했습니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녀를 위해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장기간 어려운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선종해 오랫동안 슬퍼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루치아씨 병상이 회진 때에 비어 있기도 했는데, 틈틈이 어린 딸들을 집에 가서 돌보고 와야 하는 형편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때는 하느님께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에게 더욱 어려운 병을 주시고 또 고통을 이기는 이에게 또 다음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했고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든 육신을 떨쳐버리고 선종한 루치아씨 모습은 평온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루치아씨에게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기약해 주셨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금전과 물질을 중요시 하고 세속에서의 쾌락을 누리다 여의치 않은 환경의 막다른 골목에서는 자기 목숨까지 끊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최근 사회의 상황 속에서, 어려운 형편 속에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루치아 모습이 더욱 떠오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고는…"(루카 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