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가슴으로 만나는 글벗이다. 율격의 시학과 이성적 사실주의로 시를 평하는 것은 시인에 대한 모독이다. 시는 자고로 가슴으로 읽어야만 제맛이다.
시는 여행자에게 늘 가벼운 길벗이다. 길 위의 나그네에게 시는 늘 새로운 희망과 용기, 강렬한 영혼의 울림을 선물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새로운 글벗과 길벗으로 세상에 나온 시집들을 모았다.
참된 시작
박노해/ 느린 걸음/ 8500원
내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 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 나의 완성은 남김없이 없어지는 것// 작아지고 작아져서/ 순결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상처를 담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진 나 (‘작아지자’ 중)
「참된 시작」은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이 1993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출판 당시 한 달 만에 초판 3만 부, 1년 만에 6만여 부가 판매된 화제의 시집이다. 출간 23년 만에 나온 이번 개정판은 시인이 시 한 편 한 편을 섬세하게 다듬어 서정적 깊이와 완성도를 높였다. 1991년 사형 선고를 받은 서른넷의 시인은 7년 6개월간 한 평 안 되는 감옥 독방에서 임박한 죽음과 신념의 죽음 앞에서 침묵으로 삶을 희망했다. 시집에는 죽음이라는 세상 끝 절망의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는 43편의 희망가가 담겨 있다.
데리고 가요
허종열/ 책만드는집/ 1만 원
푸른 잎 탐스러운 클로버 풀밭에서/ 사방에 널린 세 잎 거들떠보지 않고/ 행운의 네 잎만 찾아 이리저리 헤맸네// 흔해서 하찮았던 하얀 꽃 푸른 세 잎/ 그 잎이 행복인 줄 까맣게 모르고/ 행운에 눈멀고 귀먹어 마구 밟아왔었네 (‘지금 여기 행복이’)
평화신문 편집국장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홍보팀장을 역임했던 허종열(이냐시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기교와 허식의 기름기를 빼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담백한 글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사랑의 섬
김영대/ 새날출판사/ 7000원
그 섬에 가면/ 가슴이 뭉클하다/ 그 섬에 머물면 좋은 사람이 된다// 수평선에 해가 묻히고/ 동녘이 훤해질 때/ 사랑의 사람이 된다// 무딘 손 잡으며/ 나는 알게 된다/ 누구나 사랑하는 형제가 된다 (‘사랑의 섬’ 중)
김영대(루도비코) 전 광주 세나뚜스 단장의 두 번째 시집. 「문예비전」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소록도 한센병 환우 봉사를 통해 얻은 신앙 체험을 잔잔한 시어로 고백하고 있다.
숲에 관한 기억
김선희/ 동학사/ 1만 원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음이 바뀌는 풍경/ 내 안의 가파른 길 그 길 어디 깊은 공터/ 먼 산도 지척에 있는 듯 끝과 끝이 닿아 있다// 끝나도 계속되는 도돌이표 노래처럼/ 한밤에도 백야 같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한시도 잠들지 않네, 내 그늘의 환한 늪 (‘환한 늪’)
「사상과 문학」 편집장과 한국가톨릭문인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김선희(베로니카) 시조시인의 시조집. 시인은 시단에서 꿈꾸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에 대한 욕망과 새로운 삶의 변화에 대한 꿈이 그의 시에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게 평단의 하나같은 목소리이다. 시인 역시 자신의 시 쓰기는 다가올 듯하다가 멀어지는 평생 짝사랑이며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통한, 미완의 삶에 대한 자신의 기도라고 말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