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의 무언극’ 초대전 여는 송번수 교수
동생을 낳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와 살았다. 아버지는 엄했다. 정 붙일 데가 없었던 소년은 학교 수업이 끝나도 곧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학교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며 외로움을 삼켰다. 성인이 돼 결혼해 여덟 살이던 아들을 뇌종양으로 잃었다. 그의 곁엔 ‘불행’과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태피스트리 작가 겸 판화가 송번수(베네딕토, 74) 교수의 인생 이야기다. 태피스트리는 여러 가지 색의 실을 사용해 손으로 짠 직물 작품이다.
송 교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한국 현대미술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그를 “한국 현대미술뿐 아니라 한국현대종교 미술의 맥락에서 매우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송 교수는 자신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 온 가난과 고통, 외로움, 시대적인 아픔을 신앙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2002년 수원교구 광주 능평성당 제대 뒤 벽에 설치된 태피스트리 작품 ‘미완의 면류관’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 가톨릭 신앙과 예술적 신념의 합일체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는 가시관을 사실적이면서도 표현적으로 묘사한 대작이다.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4m에 이르는 단색조 작품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대신하는 둥근 형태의 가시 면류관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당한다.
“미완의 면류관은 당시 주임이었던 황창연 신부님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작하게 됐지요. 2000년을 유지해온 십자가의 완벽성과 영성을 대체할 그 무엇을 찾다 ‘원’을 떠올렸고, 원에 대비시킨 그리스도교의 이미지로 가시를 떠올렸습니다. 가시 면류관이 미완성으로 끊어진 것은 면류관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신자 각자의 몫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6월 18일까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50년의 무언극’이란 제목으로 초대전을 열고 있다. 송 교수는 ‘작가란 본질적으로 시대의 기록자요 감시자이고 나아가 비판자여야 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 시대의 아픔을 태피스트리 작품으로 기록하는 작업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사회문제를 다룬 태피스트리 작품은 히로시마 원폭을 주제로 한 장 뤼르사의 ‘히로시마의 인간’(1957) 정도다.
그는 1970년대부터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바라보며 경고와 고발의 언어를 습득했고,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서 독백의 언어를 습득했다. 또 신앙을 통해서는 숭고함을 작품에 불어넣을 수 있게 됐다. 작품의 주요 소재인 ‘가시’는 장미 가시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의 국화 장미 가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수난사를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환경문제가 점차 전쟁터의 폭격기 공습처럼 인류를 위태롭게 할 것임을 경고한 1974년 작 ‘공습경보’ 시리즈, 이라크에서 매일 벌어지는 자살폭탄 테러와 같은 비보를 접하고 제작한 ‘이라크에서 온 편지’(2006), 동일본 대지진 참사를 다룬 ‘2011.3.11’(2011) 등은 그를 사회문제를 다루는 세계적인 태피스트리 작가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최신작도 선보인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희망으로 전환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조국의 여명’(2016)이다.
송 교수는 “앞으로 신앙은 물론 더욱 실력을 쌓아 작품의 한 장면만 보더라도 가슴 저린 감동을 주는 성미술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