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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2006년 서울대교구청 앞마당 성가정상 앞에 앉아 있는 정진석 추기경, 1937년 첫 영성체 후 모습,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첫 알현 모습, 정 추기경 문장과 사목 표어, 1960년대 소신학교 학생들과의 소풍. 가톨릭평화신문 DB |
추기경 정진석
허영엽 신부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만 2000원
1940년 무렵 추운 겨울 새벽 어스름. 한 어린이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인적 없는 서울 한복판 을지로와 종로 일대 전찻길을 홀로 당당히 걸으며 외친다. “나는 꼬마 주교님이다!”
복사를 서기 위해 서울 명동대성당을 향하던 어린아이의 당돌한 행동에 주님 뜻이 깃드신 걸까. 신비롭게도 이 어린이는 참말로 훗날 한국 두 번째 추기경이 돼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을 이끄는 인물이 된다.
젊은 시절 발명가를 꿈꿨던 서울대 공학도. 그러나 모든 이에게 참 행복을 주는 봉사하는 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사람. 39세 최연소 주교가 된 뒤 서울대교구와 청주교구의 교구장직을 40년 넘게 수행하며 막중한 사목적 현안을 두루 살핀 추기경.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사제와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이자,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을 전해오고 있는 교회 큰 어른. 정진석 추기경의 삶과 신앙 일대기를 담은 「추기경 정진석」이 출간됐다.
「추기경 정진석」 이야기는 허영엽(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신부가 엮었다. 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시절 교구장 수석비서로 활동했던 허 신부가 당시 추기경이 틈나는 대로 들려주는 일화들을 메모했고, 이와 함께 다양한 방편으로 수집한 자료들을 꼼꼼히 모아 엮었다. 책에 담긴 추기경 일대기는 2016년 5월부터 약 1년 6개월간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기도 했다.
1931년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나흘 만에 세례를 받은 어린 진석은 가족들의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란다. 보통학교 시절 명동성당 새벽 미사의 가장 부지런한 복사로, 일본 어린이들만 드나들던 ‘어린이 도서관’에 숨어 들어가 위인전에 빠진 ‘꼬마 독서광’으로 지낸 귀여운 유년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6ㆍ25전쟁으로 점철된 이 시기 한반도는 온통 잿빛이었다. 청년 진석은 인민군의 포탄에 육촌 동생을 잃고, 이후 국민병에 소집돼 고난의 행군을 하던 중 눈앞에서 동료들을 잃는다. 한국 근현대사의 뼈아픈 시련은 진석으로 하여금 ‘하느님 뜻’을 깊이 성찰하게 했다. ‘그래 모든 이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제가 되자!’ 이윽고 그는 평소 꿈꾸던 발명가가 아닌,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는 사제의 길을 택한다.
주교이자, 추기경으로 교구장직 수행만 40여 년. 정 추기경의 삶은 현대 한국 교회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1970년 39세 나이로 청주교구장 주교가 된 그는 신자 교육과 성소 계발, 새 성전 건립에 온 힘을 쏟아 큰 성과를 이룩하면서도 사제와 모든 세대 신자들을 가슴으로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98년 선배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교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다양한 사목을 전개한 모습, 2006년 한국 두 번째 추기경이 된 뒤 생명 나눔 운동과 북한 교회 선교, 신자 영적 성장에 매진한 추기경의 발자취가 420쪽에 이르는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 추기경은 19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추기경 집무실에서 만난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더할 수 없이 부족하고 미천한 저에게 막중한 책임을 주셨지만, 그때마다 제 ‘자격 미달’을 보충해주셨다”면서 “오늘날까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선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드리며, 한 사람의 일생을 꼼꼼히 기록해 회고록으로 정리해주신 허영엽 신부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고맙다”고 전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의 말씀과 행적은 교회사를 이루는 발자취이기에 책으로 엮게 됐다”며 “추기경님의 추억 속 여행을 탐방하듯 함께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