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의 시장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는 요즘, 과연 종이책에 대한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책 종이 가위’라는 조금 독특한 제목의 이 영화를 보면, 그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일본의 유명한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철학이 담긴 인터뷰와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는 모습과 함께 종이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펼쳐진다.
책의 모양을 만들고, 책의 내용을 드러냄으로써 본질을 시각화해내는 것이 북 디자인이다. 노부요시가 특별한 것은 그의 북 디자인이 모두 수작업이라는 점에 있다. 그는 직접 종이와 문자를 고르고, 자르고, 붙이고, 구기고, 펼치는 등 수작업으로 책 표지를 만들어낸다. 좋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은 요즘,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법도 하지만 한결같이 맨손을 고집한다. 그는 종이의 질감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수많은 폰트를 하나씩 비교하며,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서라면 인쇄소까지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책이 1만 5000여 권이다.
영화를 만든 히로세 나나코 감독은 노부요시를 밀착 취재, 그의 장인 정신과 종이책에 대한 진심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도록 영화를 책처럼 장(章)으로 구성했다. 관객은 영화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기쿠치 노부요시라는 사람과 종이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종이와 인쇄 기술의 폭이 점점 축소되고, 책의 의미가 퇴색해가는 현실 속에서 그는 이미 사라진 공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종이책의 수요가 적어지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종이책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전면에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열아홉 살에 북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서른한 살에 북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리겠다 마음먹었다는 노부요시. 돈만을 쫓았다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종이책이 소설의 몸’이라고 말하는 그는, 무형의 글에 몸을 만들어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종이책의 창조자인 셈이다. 하느님도 우리를 만들 때, 그처럼 정성스레 흙을 고르고, 반죽하고, 빚고, 숨결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을 예사로이 넘길 수 없어지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내 앞에 놓인 종이책이 달라 보인다. 책의 표지를 만져보고, 꼼꼼히 디자인도 살펴본다. 무심코 지나쳤던 책의 디자인에 이렇게 많은 정성과 마음이 깃들어 있다니! 새삼 감사하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노부요시를 생각하며 이번 가을엔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펼쳐보자. 종이책을 펼치기에 앞서 책의 모양과 표지, 디자인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자.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9월 13일 개봉
서빈 미카엘라(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 극작가·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