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 장기화에 더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까지 확산되고 있는 요즘, 전쟁의 비극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품들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바로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생명의 기념비’ 전.
성북구립미술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의 핵심은 조각가 최만린(알베르토, 1935~2020)의 예술 활동을 알리는 작품이자 대표작인 ‘이브’ 시리즈다. 총 여덟 점의 ‘이브’ 가운데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네 점이 그의 회고전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복원을 마치고 돌아온 ‘이브 58-1’은 3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장유정 학예연구사는 “‘이브’는 성경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을 넘어 사람의 대명사”라며 “‘이브’라는 표제가 붙은 작품들은 6ㆍ25 전쟁이라는 극한의 경험을 겪어낸 한 예술가의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자, 어쩌면 지금도 전쟁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8년과 1961년 초기작이 여성의 인체를 표현했다면 이후 작품들은 성별의 구분이 사라진 형태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던 최 작가는 살아야겠다는 동물적인 감각과 폐허 속에서도 생명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로 ‘이브’ 시리즈를 작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전에 그는 “‘이브’는 나의 생명에 대한 기념비라고 생각한다”며 “부서진 생명, 죽음에 임박했던 생명을 다시 한 번 쌓아올리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동시대에 전쟁을 겪은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동료를 애도하며 한 땀 한 땀 그려낸 김창렬의 ‘물방울’, 앙상한 나목 앞에 선 소년을 포착하여 전쟁의 참담함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임응식(요셉)의 사진 ‘나목’ 등이다.
최만린 작가가 ‘이브’를 만든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며 공감했던 안장현의 시 ‘전쟁’과 한국전쟁을 그린 폴란드 시인 타데우쉬 루제비츠의 ‘한국의 봄, 파종기에’도 전시 중이다. 또 전쟁의 참상을 인공지능을 활용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한 한승훈의 영상 작품 ‘선명한 꿈’과 ‘이브’와 관련된 드로잉, 아카이브 자료가 함께 공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12월 3일까지 휴관일인 주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 사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한편 최만린미술관은 성북구립미술관 분관으로, 최만린 작가가 30년간 거주했던 서울 정릉 자택을 성북구에서 매입해 지난 2019년 미술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작가가 작업실로도 활용했던 장소로, 켜켜이 쌓여 있는 삶의 흔적은 물론 나무 계단 및 천장, 높은 층고, 아치형의 문, 작은 정원 등 여느 주택과는 다른 이색적인 공간이 뿜어내는 멋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