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에 이어 12월이면 떠오르는 러시아 영화가 있다. 스베틀라나 수하노바 감독의 ‘행복을 전하는 편지’. 양귀비꽃 핀 들녘, 바다 위 낙조와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의 정경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동화마을로 들어간 듯 아름답다. 손편지를 주제로 엮은 세 편의 이야기가 오랜 세월 집배원을 해온 안토니아 부인이 신입 집배원 타냐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펼쳐진다.
죽음 앞두고 떠난 사진 세계 일주
1편은 노인이 된 표도르와 안드레이 이야기. 어느 날 표도르가 신문을 들고 와서 지역신문 퀴즈 이벤트에 1등이 되어 세계를 일주하게 됐다고 흥분한다. 여행 중에 표도르는 편지와 사진, 기념품을 안드레이에게 보낸다. 하루는 편지 속에 있던 표도르의 연인이 찾아와 진실을 말해준다. 병으로 자기 삶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안 표도르가 요양원에 들어가 사진기사의 도움으로 그토록 가고 싶었던 지역 사진에 자신을 합성하여 보냈다는 것이다. 거짓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남은 삶을 자신의 소원대로 이벤트화한 것이다. 마을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던 표도르가 이제는 건강상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비로소 사진여행을 떠난 것이다. 안드레이에게 부탁한 장례식이 모두를 당황하게 하지만 매우 철학적이며 코믹하다.
얘들아! 엄마는 항상 먼저 용서한단다
2편은 기차 역무원인 마리나가 추운 겨울 온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시작된다. 이미 지난 기차표를 들고 겨우 이름만 기억하는 노인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집으로 모셔오지만, 남편이 노인의 짐에서 신분증을 찾게 되면서 할머니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을 버려 상처를 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마음의 평화를 주려는 엄마…. 돌아가신 엄마와의 사이에 상처를 안고 있던 마리나는 할머니를 통해 자녀들이 상처를 주거나 못되게 굴어도 엄마는 항상 먼저 용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아 소년의 크리스마스
3편은 사고로 부모를 잃은 세비치가 마을의 이런저런 일을 하며 근근이 사는 할아버지와 지내는 이야기다. 촌스러운 옷을 입고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며 친구들이 놀리자 세비치는 친구를 얻기 위해 로봇이나 큰 소방차를 달라고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산타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친구들과 실랑이하는데 선생님의 답도 재미있고,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가 보이는 모습도 퍽 지혜롭고 정겹다.
이 시기 잘 맞는 영화다. 제7회 가톨릭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이 영화는 세 편 모두 실화라는 점에서 더 감동을 준다. 이메일로 담을 수 없는 정서가 꾹꾹 눌러쓴 편지글을 통해 전달된다.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기적을 안 믿고 살거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두 가지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감독의 시선도 좋다. 기적을 안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가 하거나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삭막한 느낌을 주지만,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이든 누군가의 도움이든 삶을 동반하는 존재를 믿으며 사는 것으로 풍요롭고 든든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기적을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온라인 채널 관람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