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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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서 자라고 수도원에 묻힌 음악가 안톤 브루크너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 - 오스트리아 린츠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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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가 연주한 성 플로리안 수도원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1년 내내 곡 연주되고 다양한 전시·축제 이어져
수도원 도서관 방대한 서적·천장화에 휘둥그레
매년 9~10월 브루크너하우스서 국제 페스티벌



올해 전 세계 클래식계가 주목한 음악가는 안톤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 1824~1896)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 필하모닉은 1월 1일 신년음악회에서 이례적으로 브루크너의 음악을 연주했고, 2020년부터 시작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11개) 녹음도 마무리했다. 브루크너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1년 내내 그의 곡이 연주되고 다양한 전시와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연초부터 연주회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음악은 동시대 독일어권 작곡가들의 작품에 비해 대중에게 익숙하지는 않다. 유럽의 다양한 음악축제를 취재해 온 기자 역시 처음으로 브루크너의 발자취를 좇아 14일 오스트리아 린츠(Linz)를 방문했다.
 
안톤 브루크너. 출처=Wikimedia Commons

브루크너의 뿌리가 된 성 플로리안 수도원

린츠 중앙역에서 시외버스로 30분을 더 달려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에 도착했다. 가뜩이나 몰아치는 비바람에 인적 드문 외곽으로 빠지는 버스 안에서 국제 미아가 될까 두려운 감정이 목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잘 찾아왔으니 안심하라’는 듯 노란 파스텔톤의 종탑이 보인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바로크 건축 양식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Stift St. Florian)은 304년 순교한 플로리안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수도자도 아닌 음악가의 궤적을 밟으면서 수도원을 찾은 이유는 브루크너가 오랜 세월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인근 안스펠덴(Ansfelden)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들로부터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운 브루크너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시절 수도원의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바이올린과 오르간 등의 연주법을 익힌다. 이후 린츠에서 교사 수업을 받은 브루크너는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가 되어 돌아온다. 더불어 소년성가대의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로서 수도원의 음악 활동에 다각도로 참여하게 된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 정중앙에 위치한 도서관. 수도원 전체적으로 15만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 정원 곳곳에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물이 조성되어 있다.



수도원에서 쌓아올린 브루크너의 음악

성 플로리안 수도원은 현재 하루 3회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다. 가이드가 커다란 열쇠로 일일이 문을 열어주는 곳만 둘러볼 수 있는데, 처음으로 들어선 장소는 수도원 정중앙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바르톨로메오 알토몬테의 아름다운 천장화와 고풍스러운 책장, 그곳에 빽빽이 놓인 고서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이드는 이 곳이 수도원과 속세, 영성과 지식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했다. 수도원 전체적으로는 12개의 공간에 15만여 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반인도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브루크너 역시 이곳에서 그의 음악적인 성을 쌓아나갔다. 1845년 이후 10년간 이 방대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대위법을 공부하고 연마했으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노트와 악보들 역시 수도원의 새로운 소장품이 되고 후대 음악가들을 위한 기록이 되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 지하에 자리한 안톤 브루크너 석관.

수도원을 떠나 걸은 외로운 음악가의 길

브루크너는 서른 살이 되던 1855년 수도원을 떠나 린츠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린츠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작곡에 뜻이 있었던 그는 당대 음악이론 교육의 1인자였던 지몬 제히터 문하에서 6년간 대위법과 화성학을 공부했고,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관현악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러나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면하면서도 꼼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곡을 여러 차례 고쳐 수많은 개정판을 낳았고, 평생 11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두 곡은 습작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우리에게 브루크너 음악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음악이 난해하고 그만큼 많이 연주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음악에는 주제 선율이 있는데, 브루크너의 음악은 뚜렷한 선율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60분 이상의 대곡이 많았고, 자신이 치밀하게 공부하고 연구한 이론을 쏟아부은 복잡하고 거대한 연주는 악단은 물론이고 청중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발표하는 곡마다 혹평을 받았고, 빈 필하모닉은 그의 곡을 연주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당시 빈에서 영향력이 컸던 브람스 지지자들은 바그너를 추종하는 브루크너를 시골 촌뜨기 취급하며 무시하기도 했다.

브루크너가 이른바 ‘성공’을 거둔 것은 1884년 초연된 교향곡 7번을 통해서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그 기세를 이어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다른 작품들도 점차 호평을 받았고, 만년에는 꽤 인정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았다.

 
개관 50주년을 맞은 ‘브루크너하우스 린츠’에서는 매년 9~10월 ‘국제 브루크너 페스티벌’이 열린다. 올해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브루크너의 11개 교향곡을 모두 연주하고 있다.

다시 돌아온 린츠, 그리고 수도원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대성당 뒤편에는 약 7300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브루크너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다. 브루크너가 수도원에서 생활했을 때 연주했던 바로 그 오르간이다. 그리고 이 오르간의 지하에는 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놓여 있다. 음악가들에게는 꿈의 도시였던 빈에서 활동하며 빈 대학 등에서 교직을 맡기도 했던 브루크너는 선종 후 몸과 마음의 고향이자 신앙의 원천이었던 수도원에 돌아오길 희망했다.

린츠는 브루크너 탄생 150주년이던 지난 1974년 도나우 강변에 대규모 공연장인 브루크너하우스를 건립하고 매년 브루크너의 생일인 9월 4일부터 선종일인 10월 11일까지 ‘국제 브루크너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연주회는 물론이고 다채로운 전시와 스포츠 행사까지 곁들여 브루크너와 린츠를 알린다. 특히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브루크너가 남긴 11개 교향곡을 원곡 형태로 모두 연주하고 있다.

알프스 지역의 이상기후로 폭설과 폭우·돌풍이 동반된 9월 중순, 추위와 비바람을 뚫고 브루크너하우스 객석에 앉아 브루크너 교향곡 2번을 들었다. 휴대폰에서 계속 울리는 현지 경고 알림에도 진행한 17시간의 힘겨운 취재를 달래는 감동적인 연주였다. 브루크너의 곡이 국내에서도 재조명될 수 있을지, 앞으로 브루크너의 흔적을 찾아 린츠나 성 플로리안 수도원을 찾는 여행객이 늘어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자가 린츠에 다녀온 직후 철로 복구 작업으로 빈-린츠 구간 기차 운행이 중단된 걸 보면 주님께서 이 기사는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바라신 것 같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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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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