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과 강원도 고성에 작업실이 있지만, 노트북만 있으면 카페는 물론이고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일한다. 종이 악보에 음표를 직접 그리기보다는 AI를 비롯한 각종 디지털 장비를 적극 활용하고 SNS로 알리고 소통한다. 정통 클래식부터 가곡·국악·새로운 장르의 음악까지 경계를 넘나드는가 하면 글도 쓰고 연주도 하고 공연도 기획한다. 이른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N잡러’ 등 21세기 신조어를 온몸으로 실행하고 있는 그는 1990년생 작곡가 손일훈(마르첼리노)씨다.
디지털노마드 N잡러
서울예술고등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를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석사 및 최고 과정을 마친 그는 익숙했던 서울과 헤이그를 떠나 현재 주로 고성과 본에서 생활한다. 고성은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고, 본은 아내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재형(가타리나, 본 베토벤 오케스트라 제2악장)씨와 생활하는 곳이다.
“제 일이 굉장히 좋은 게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혼자 작업하다 서울이나 쾰른·암스테르담 등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공연도 보고 제 무대도 선보이고요. 되게 있어 보이죠.(웃음)”
멋지긴 한데, K-POP이 전 세계를 주름잡는 요즘, 2세대 아이돌과 비슷한 연령의 그는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이른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지부터 궁금했다.
“솔직히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건 맞아요. 제가 감히 얘기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요. 왜냐하면 모두 다르게 살고 있거든요. 아마 작곡만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자칫 자랑처럼 들릴 수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저 역시 곡 작업뿐만 아니라 음악감독·연주활동도 같이 해요. 음악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음악에 관련된 모든 걸 하고 싶어요.”
그의 활동은 그야말로 다채롭다. 위트레흐트 가우데아무스 뮤직페스티벌·할렘 국제 오르간 페스티벌·프랑스 오를레앙 국제 피아노 콩쿠르 등 국제적인 현대음악 무대는 물론이고, 2017년 결성한 앙상블 클럽M의 상주작곡가로 매년 정기연주회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평창대관령음악제 기획 및 자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개관 10주년 기념 SAC챔버앙상블과 부평아트센터 브런치콘서트의 음악감독, 마포문화재단 M 클래식 축제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지난 5일에는 현대음악앙상블 ‘소리’가 21세기 음악을 소개하는 ‘동방신곡(東方新曲)’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곡가로 섭외돼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고전을 익혀 지금을 담아내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뒤로는 클래식만 들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음악만 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바흐·모차르트·베토벤·쇼팽 등은 물론이고 그 전후·동시대 수많은 작곡가의 다양한 곡을 익혔다. 하지만 감상하는 것을 좋아할 뿐 그가 짓는 음악은 스타일이 다르다.
“제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때와 같지는 않잖아요. 항상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지금 시대를 담아야 한다’고 얘기해요. 전통적인 음악사부터 새로 나온 음악까지 파악하는 건 너무나도 중요해요. 그런데 모든 걸 다 배울 수는 없어요. 그러다가는 활동을 못 하고 학자가 되거든요.”
실제로 그의 곡 가운데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은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로 ‘스무고개’를 하며 공연마다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동명의 실험적인 음악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윷놀이, 모 아니면 도’ 역시 대금과 피리 파트가 말과 윷이 돼 연주자들의 즉흥연주에 따라 윷놀이 결과가 달라진다. 모두 음악과 게임을 접목한 그의 ‘음악적 유희 시리즈’의 일환이다. 그런가 하면 나태주 시인의 시에 곡을 입힌 가곡 ‘소망’(QR코드1)도 최근 자주 불리고 있다.
사회가 급변하는 만큼 음악적으로도 배울 게 많지만, 그는 기술의 발전을 빌려 시간을 절약한다. 굳이 원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될 과정은 클릭 한 번으로 많은 것을 처리하고 활용 방안을 고민한다.
“도구가 있으면 써야죠. 자동화된 것들은 빨리빨리 말랑말랑하게 흡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제 작업 시간이 늘어나고, 컴퓨터가 쉽게 처리한 작업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게 이제 능력이고 탤런트인 것 같아요. 지금은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너무 많은 걸 잘해도 스페셜리티가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역 안에서 조금씩 전문성을 넓혀가려고 합니다.”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기 위한 음악
모름지기 예술가는 특별한 탤런트를 지니고 태어났고, 그 재능을 발현하며 살고 있으니 하느님의 존재를 더 가까이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태신앙인 그 역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복사를 하며 다양한 전례에 참여했고, 유학 전에는 2~3년간 본당 성가대 지휘를 맡기도 했다. 그때보다 성당 찾는 횟수는 줄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믿음의 밀도는 높아졌다.
“복사 대장도 하고 예비신학교도 다니고, 당시에는 당연히 ‘신부님이 되면 어떨까’도 생각했죠. 그 마음은 음악을 하면서 멀어졌지만, 신앙은 멀어지지 않았어요. 냉담한 시기도 있고 지금도 매주 미사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제 활동이 ‘되돌려 드리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어요. 지금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꾸준히 작업해서 많은 사람에게 제 작품을 알렸을 때 이 메시지가 더 뚜렷해질 텐데, 완성도의 기준은 저를 비롯해 그 누군가가 아니라 첫 번째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교회음악을 따로 작업하지는 않았다. 단편영화에 쓰인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 아내 재형씨가 첼리스트인 오빠 호찬(요한 사도), 비올리스트인 동생 서현(헬레나)씨와 함께 공연할 때 가브리엘·라파엘·미카엘 등 세 천사에 관한 곡 ‘메신저스(Messengers)’를 쓴 정도다.
“언젠가 미사곡은 꼭 써보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어요. 때가 되기를, 좀 더 무르익기를요. 우선 가톨릭 안에서 연주하시는 분들과 함께 작업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임선혜(아녜스) 소프라노가 제 가곡 ‘소망’을 종종 부르신다고 들었거든요. 같이 작업해보고 싶고, 첼리스트 이호찬과 작업한 ‘이른 봄’이라는 음반은 곧 공개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11월 위령 성월을 맞아 추천곡을 물었다.
“슈베르트의 ‘만령절의 기도(Litanei)’(QR코드2)요. ‘모든 영혼을 위한 기도’라고도 하는데, 성인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겠죠. 짧은 가곡인데, 마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