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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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 기획(2)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사전의료지시서

품위있는 죽음, 준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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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나는 내가 의식작용을 못하게 되는 경우 약물과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은 하지 않도록 주위에 늘 당부해 놓고 있다. 식물인간이 돼서까지 죽는 기한을 늦추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국내 굴지의 SK그룹을 이끌었던 고 최종현(1929~1998년) 회장이 생전에 쓴 육필원고에 담긴 내용이다. 최 회장은 폐암수술을 받은 후 다시 병세가 악화되자 항암제나 방사선치료를 거부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담담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최 회장의 의연한 죽음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례2=2005년, 심장마비로 15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테리 시아보라는 여성 환자가 있었다. 생명유지장치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남편은 이 장치를 제거하기를 원했고, 시아보 부모는 극력 반대했다. 이 문제는 결국 법정으로까지 갔고, 법정은 시아보가 평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한 시아보는 곧 세상을 떠났다.

 최종현 회장이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던 당부를 구속력 있는 문서로 좀 더 구체화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전의료지시서`다. 다시 말해 `임종이 가까워 판단능력이 없어질 때를 대비해 자신이 받고자 하는 치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신에 대한 의료행위의 의사 결정, 대리인 지명, 심폐소생술 거절, 원하지 않는 치료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대한의학회 의료윤리지침)이 `사전의료지시서`다.

 임종 직전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던 최 회장은 어쩌면 사전의료지시서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아보처럼 많은 경우 그렇지를 못하다. 시아보의 `사전 의사결정`이 구두가 아닌 문서로 남아 있었다면 이 문제는 그토록 오래 끌지도, 복잡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사전의료지시서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더 이상의 치료가 말기 환자에게 의미 있는 삶이 아닌 고통받는 기간만 연장시킬 뿐인 경우다.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임종환자에게 시행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명치료에 대한 환자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 의사 결정이 사전에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임종 직전이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는 판단이나 결정이 불가능하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문제는 안락사 논쟁과 직결된다. 이유야 어떻든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안락사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 곧 안락사라고 한다면 사전의료지시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환자의 사전 결정이 치료 과정에 개입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모든 치료는 전적으로 의료진 결정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허대석(서울대 의대) 교수는 최근 사전의료지시서 관련 세미나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문제를 환자와 상의하는 문화가 형성돼있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환자 본인이 병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발적 의사로 진료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무엇인가. 인간 생명을 인위적으로 앗아가는 안락사를 반대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품위있는 죽음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1980년에 발표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고통스럽게만 생명을 연장해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고 밝혔다. 또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2278항에서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기구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는데, 이는 환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며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반대하지 않는다. 교회가 사전의료지시서를 인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전의료지시서 그리고 문제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나 서구에서는 환자가 사전의료지시를 통해 생의 마지막 단계의 의학적 조치에 대해 의료진과 미리 함께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추세다. 사전의료지시서 양식은 다양하다. 교회에는 미국 가톨릭생명윤리센터가 제정한 것이 있으며, 개인별로 세부 조항을 첨부할 수 있다.

 모든 사안이 그렇듯 사전의료지시서 역시 문제점이 없을 수 없다. 의료비용을 절감하고, 원치 않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에서 사전의료지시서를 제도화한다면 이는 안락사를 제도화하자는 취지로 발전될 가능성이 크다. 환자 자율성에 따른 치료수단 선택이 최선이라고 강조된다면 사전의료지시서는 환자의 일방적 요구만 담게 되기 쉽다.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자칫 자살하려는 의지까지 존중하는 것으로 비약될 수 있다.

 사전의료지시서가 의학적 상담 없이 작성되는 경우도 큰 문제다. 일반 환자가 의학적 치료를 거부할 때는 의사가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의 경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익(가톨릭대 생명대학원장) 신부는 `사전의료지시서 논의와 내용에 관한 윤리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사전의료지시서는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니고 임종할 수 있도록 환자가 의료진에게 요청하는 당부 형태의 지시서가 돼야 한다"며 "치료의 지속 또는 거부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형태의 문서가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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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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