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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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기획] 십자가 길을 걷는 사람들(2)

주님 떠올리며 힘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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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성모병원 가정간호센터 본당연계 가정간호 박미자 간호사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 제가 돌보는 이를 예수님으로 생각하면 매일이 즐겁답니다."



■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

“주님! 나의 주님.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이 험한 언덕을 올라가시는지요. 만신창이가 돼 일어날 힘조차 없으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내 딸 베로니카야. 모두가 외면했지만 너는 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는 내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거쳐야할 과정이다. 너의 사랑을 나눠줘서 정말 고맙구나.”

“알겠습니다. 주님. 어서 가십시오…. 어서 가 창조 때부터 마련된 구원사업을 완성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온갖 고초와 비웃음을 받으며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딛었던 십자가의 길, 골고타 언덕. 조용히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응원하던 베로니카는 수많은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께 달려 나가고 만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조롱받으며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신심의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을 기꺼이 나눠 주는 이 시대의 베로니카가 있다.

2004년 11월 가정간호사로 서울 대방동성당에 파견돼 병원조차 찾을 수 없는 소외된 환우들의 눈물과 상처를 닦아주고 있는 박미자(안젤라?강남성모병원 가정간호센터 본당연계 가정간호) 가정 간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매일 오전 9시 대방동성당에 출근해 하루 평균 열 명의 환우를 방문하며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만난다.

3월 6일 오전. 이날은 대방동본당 성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된 이재연(마리아?48?대방동본당)씨를 만나는 날이다. 박 간호사가 매주 한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씨는 뇌 합병증으로 인한 수두증(머리에 물이 차는 병)으로 전신마비가 와 이제는 왼팔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재연이가 많이 기다리겠네요. 어제도 보고 싶다고 전화 왔었는데.”

늦었다며 한 손에 조제약과 치료보조기가 담긴 가방을 들고 발걸음을 재촉한 박 간호사를 이씨가 반갑게 맞았다.

“늦어서 미안, 일이 너무 많아서 마음처럼 자주 들르질 못하네. 이상 있는 데 없지? 뜨거운 물로 발마사지 해줄게.”

도착하자마자 이씨의 건강상태부터 체크하는 박 간호사. 작년 수술로 배변능력이 부쩍 약해진 이씨를 위해 양동이를 준비하고 물을 데웠다.

준비하는 사이 서로 못 다한 말을 하며 웃느라 오랜만에 집안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언니, 고마워요. 그냥 말벗만 해주는 것도 너무 좋은데 제 심신의 상처도 돌봐주시잖아요. 언니 덕분에 많이 극복한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네 성격이 언제나 밝고 믿고 따라와 준 덕분이지.”

서로를 믿고 기다려줬던 시간은 이들을 한 가정의 가족으로 만들어줬다. 언니 동생으로 지내온 4년의 시간은 이제 얼굴상태만 봐도 컨디션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언니 커피 타 드릴게요. 여기 앉아계세요.” 이씨가 손수 타온 커피를 박 간호사에게 힘겹게 내밀었다. 커피를 전해 받은 박 간호사는 그동안의 힘겨웠던 노력이 떠오르는지 어느덧 고개를 떨궜다. 그만큼 그동안 함께 흘린 땀과 노력은 박 간호사를 감동시켰다.

“처음 재연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무슨 일이든 의지하려고 했죠.” 전신마비가 와 왼팔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이씨였지만 최소한 밥과 용변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 박 간호사는 무엇보다 이씨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데 힘을 쏟았다.

할 일이 많았다. 먼저 이씨가 스스로 휠체어를 타는 것이 필요했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으니 신경질도 내고 자꾸 의지하려고 하더군요. 옆에서 지켜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보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한계라고 느껴지면 그제서야 도와줬다. 이씨를 생각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박 간호사와 이씨의 끈질긴 노력으로 드디어 휠체어를 혼자 힘으로 탈 수 있게 됐다. “정말 감격스러웠죠. 멘토가 되어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이가 한계를 극복하는 상황이 벌어지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던걸요.”

자신이 돌보는 환우들이 희망을 갖고 한 단계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더없이 기쁘다는 박간호사. 40분간의 짧은 만남을 갖고 점심도 잊은 채 또 한명의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돌보는 이들을 예수님으로 생각하면 오늘같이 즐거운 일이 일어납니다.” 박간호사의 얼굴은 행복함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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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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