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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나’ 안아주기 / 양하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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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고 있다. ‘신부님’, ‘대리님’, ‘선생님’, ‘엄마’, ‘아빠’, 내 이름 대신 자식 이름으로, 배우자 이름으로도 불린다. ‘1708호’와 같이 아파트 호수로도 불린다. 사회로 나오면서부터 이름보다 수식어로 불리는 시간이 더 많다. 아니, 나의 이름이 언제 불렸는지 기억이나 날까? 수많은 수식어에 파묻혀 언제 불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저 밑의 ‘나’는 안녕한가?

몇 년 전 문득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하느님은 나를 이 세상에 뭐하러 창조하셨는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답을 찾지 못했고 내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이 의심으로 변하며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존재에 대한 의심이 커지자 모든 것이 싫어져 방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나를 단절시켰다. 그렇게 굳게 잠근 방 안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내 존재를 의심하며 울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한 지 3일이 지난 날, 신학교 스승님으로부터 갑자기 문자 한 통이 왔다. “잘 지내?” 잘 지내냐는 문자에 홀린 듯 스승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가 왜 태어났는지, 하느님이 나를 왜 만드셨는지 모르겠다고, 답을 모르겠다고 목 놓아 울며 이야기했다. 한참을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나의 무자비한 울음을 아무 말씀 없이 끝까지 기다리시던 스승님은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말씀하셨다. 말씀의 첫마디는 ‘양 신부’가 아니었다. 나의 이름 ‘하영아’였다.

따뜻하고 편안한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스승님께서 보셨던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나를 통해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느꼈었는지도 천천히 전해주셨다. 위로의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나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도 없었다. 하지만 태어난 이유를 찾으려는 ‘나’, 창조 목적을 찾고 목적을 따라 살아갈 ‘나’를 어둠 속 저 밑에서 일으켜 들어 올려 주셨다. ‘하영아’라는 그 이름 하나로 말이다. 나조차 잊고 있었고 뒤로했던 ‘나’라는 존재가 일어나니 배가 고파졌고 목이 말라 냉장고를 뒤져 먹기 시작했다. 살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가 태어난 이유, 창조 목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 평생 찾아가는 여정일 것이다. 다만 그 여정을 이어가는 것은 수식어가 붙은 내가 아니라 수식어를 떼어내고 남은 ‘나’여야 한다. 하느님은 어떤 직위나 위치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온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나’인데, 내가 튼튼하게 일어서야 험난한 여정을 힘차게 떠날 것 아닌가. 그리고 내 앞에 붙은 수식어들에 내가 잡아먹혀 ‘나’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 앞에 붙은 수식어들로 가려지고 밀려났던 ‘나’를 일으켜 주자. 따뜻하게 안아주자. 위로받고 일어선 ‘나’로 어떤 수식어가 주어지든, 어떤 시간과 상황에서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보자.


양하영 신부(제1대리구 남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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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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