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시인의 수필집 「인연」과 더불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 왕자」입니다.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이 책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 공군에서 활약한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한데요. 1944년, 비행 중 실종되면서 마치 자기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처럼 홀연히 생을 마감했지만, ‘어른들의 동화’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삶을 사색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B612라는 행성에서 온 한 소년, 어린 왕자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바오밥 나무가 점점 커져 골칫거리인 작은 행성, 도도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그가 이 지구로 오기까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조종사는 소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해 나갑니다.
저에게는 최애 동화인지라 모든 내용이 소중하지만,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여우를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새로 만난 친구가 반가워 함께 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자신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차근차근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것, 서로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길들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인내심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말없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한 예의도 갖추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고, 나의 말을 하려 하기보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때로는 눈물 흘릴 일도 생기곤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 있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달라진 시선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너’에서 ‘오직 하나뿐인 너’로, ‘특별할 것 없던 너’에서 다른 그 무엇과도 구별되는 ‘나만의 소중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너에게 맞추고 또 낮추는 나의 변화이지요.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하나가 떠오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존재의 눈높이에 당신을 맞추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길들이신 나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여우를 길들이듯, 목자가 양들을 길들이듯 말입니다. 사랑은 가볍고 인내와 책임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기에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가 주는 울림이 더 깊이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글 _ 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