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사 80장면](1) 가톨릭 언론의 태동 ‘천주교회보’의 창간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가톨릭신문 지면 자체가 역사적 사료


조선교구 100주년·한국 최초 공의회 등 담아
한국교회 쇄신·변혁의 시대 맞는데 큰 기여
사회 불의 고발·인간 존엄성 회복 위해 노력

“本報는 左의 세 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한줌의 숨쉬기도 힘겨웠던 1927년 4월 1일. 아래로부터는 23세, 위로는 41세까지 일단의 청년 평신도들이 뜻을 모아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펴냈다. 2007년이면 역사적인 80주년을 맞게 되는 한국 ‘가톨릭신문’은 바로 이날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한국 ‘가톨릭신문’의 효시

한국 가톨릭 언론의 태동이라 할 ‘천주교회보’의 탄생에 즈음해 당시 창간호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낫다! 낫다! 적고 적은 이내 몸이 고요한 첫 새벽에 그윽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왔다/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눈이 있어도 못 보았다. 귀가 있어도 못들었고 입이 있어도 말 못했고 손이 있어도 못 적었다/알고 싶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이러저리 진리로써 인간불순 복멸하여 승전고를 울려보자/우리의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겼으며, 발사마 향으로 목욕하고 신덕으로 무기 삼아 예수 말씀 앞세우니 위세 당당 이내로세/눈 있는자 어서 보라. 입 있거던 말할지며 용맹커던 도전하라. 모든 사배 만고의 진리에 항복하리라.”

이 창간의 노래는 신앙을 지니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찬 젊은 평신도들이 눈으로도 못보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입으로는 말못하고 손으로도 쓰지 못했던 무력함을 타파하려는 뜨거운 열정의 표현이었다.

교회의 온갖 사정을 널리 알리고, 이곳 저곳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떨치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굳건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려는 젊은이들의 풍모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배(輩)’, 곧 온 세상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비록 그 시작에 있어서는 수명의 평신도들의 자그마한 몸짓이었지만 실로 그 열매는 풍성했다. ‘천주교회보’는 한국 근현대 격동기를 거쳐오면서 가톨릭신보, 가톨릭시보, 가톨릭신문으로 개칭돼 오면서, 비록 중간 중간 휴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간행을 지속해옴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이 됐다.

창간의 역사적 배경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점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일제는 이로부터 식민 정책의 전환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고, 9월 들어 이른바 문화정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외에 민간 신문을 인가하게 됐다.

다음해 3월 5일 조선일보가 창간되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종교신문의 경우에는 시국과 정치 문제에 대한 언급을 금하는 조건 아래 문화정책 발표 이전에도 발행이 가능해 1911년 감리교 선교사가 발행하는 격주간 신문이 발행됐었고 천주교에서는 월 2회 발행하는 경향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20년대를 전후해 당시 교회 안의 지식인들은 일본 가톨릭교회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의 독자들이 있었다.

1923년 창간, 현재 일본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 타임즈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천주교회보’의 발행은 바로 여기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회보의 발행은 참으로 만용이라 할 만큼 놀라운 열정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전체의 문맹률은 80에 이르렀고, 천주교 신자수는 전체 인구 1900만명 중에서 약 11만명으로 신자 비율은 불과 0.57 정도에 불과했다.

창간 이념

창간사에 나타난 ‘천주교회보’의 창간 이념은 소식보도, 의견교환, 보조일치 등 크게 3가지로서 이는 ‘조국성화’와 함께 가톨릭신문의 사시 안에서 충실하게 지켜져 왔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소식보도(消息報道) : “경향잡지가 있어 교회 소식을 보도하나 우리는 특별히 남방교구 소식을 더 많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 집안 일을 똑똑히 모름이 수치일 뿐 아니라 그 집을 더 흥왕케할 방도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의견교환(意見交換) : “우리는 교회 발전을 위하여 분투 노력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람은 행실에 있고 말에만 있지 않은즉 우리는 모든 지혜와 힘과 용맹을 다하여야 되겠고 많은 사람이 합하여 얻은 지혜는 현철한 사람의 지혜 위에 있을 수 있은 즉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조일치(步調一致) : “우리는 교회가 목적하는 그곳까지 걸어가야 하겠고 그 길에는 많은 적의 복병이 있은 즉 일치단결하여 용맹한 군대와 같이 행진곡을 따라 보조를 일치하여 규율 있고 훈련 있는 행군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고로 연락단결하여 일치한 보조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식 보도와 의견 교환의 역할과 기능은 모든 언론의 공통적인 역할과 기대로서, 가톨릭신문은 교회 안의 소식을 가장 충실히 전한,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며, 신자 대중의 신앙과 교회 생활을 전하고 그에 대한 여론을 반영해왔다.

교회 언론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보조일치의 사시이다. 가톨릭 언론은 일반 언론들과는 달리 교회의 선익, 사람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공기이며, 이는 가톨릭교회의 정통한 가르침 및 입장에 그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기여해야 하고,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부응해야 하는 교회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에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가톨릭신문 79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중요성은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이다. 1927년 창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됨으로써 가톨릭신문은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생활, 실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즉 가톨릭 액션 활동, 복음 선포의 기록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한국 최초의 공의회, 일제의 교회 탄압 등에 관한 내용들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 가톨릭신문 지면은 그 자체로 역사의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국전쟁 뒤의 지식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들, 수도회들의 진출과 창설, 각 교구와 본당들의 설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 교계 제도의 설정 등에 대해서도 가톨릭신문의 지면은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 사회와 교회에 소개한 가톨릭신문의 역할은 이후 한국 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쇄신과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크게 기여를 해왔다.

아울러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지만 6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 현실, 정치 및 사회 현실 안에서 소외 받고 고통 받



가톨릭신문  2006-04-0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9. 29

시편 121장 5절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도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