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부임하는 신부님은 애들만 좋아한대. 우리 어른들은 이제 찬밥신세야."
필자의 이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내가 본당에서 이런 오해를 받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2년간 `청소년사목` 꼬리표를 달고 다녔으니 그런 편견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호를 좀 하자면 청소년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 또한 까다롭고, 거칠고, 반항적인 아이들은 어렵고 힘들다. 게다가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려면 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30대에는 반나절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도 좋았고, 40대에는 두 시간 정도까지 마음이 즐거웠다. 50대에 접어든 지금은 15분만 넘어가도 상당한 에너지가 소비된다. 사랑하기로 선택했기에 그런 에너지를 쓰는 것이지, 좋아하는 마음이 생각처럼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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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신자들이 본당 신부에게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날 때마다 일일이 눈인사와 악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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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사목` 꼬리표 달린 신부
신자들의 편견을 해소하고, 동시에 신자 공동체에 어떻게 `부드럽게 착륙(Soft Landing)`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본당에 새로 부임하는 사제 모두에게 중요한 화두다. 특히 "누구만 더 예뻐한다"는 오해는 잘 넘겨야 하는데, 신자 한 사람이라도 소외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 목자 마음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친화적 본당 건설을 위해 먼저 청소년과 가까워져야 했지만 점진적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때가 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우선 공동체에 환대와 친교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으로 사목을 시작했다. 미사가 끝나면 신자들과 일일이 눈인사와 악수를 하며 신자들이 본당 신부에게 환영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인간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마르 6,34, 루카 15,20)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가엾이 여기시던 그 마음,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공동체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공동체 약자인 노인과 아기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사랑합니다"
특히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인들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나이듦`은 하느님 은총임을 강조했다. 미사 후에는 모든 어르신과 악수하며 안부를 여쭙고, 마주칠 때마다 환대해 드렸다. 어르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였던 노인대학을 개설해 "집이건 성당에서건 설 자리가 없다"고 소외감을 토로하던 어르신들이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런 노력에 신자들도 기쁘게 격려해 줬다. 그밖에도 성인 신자들과 만나는 여러 장에서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할 때 그 마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신자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본당 신부가 아이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청소년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신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여타 신부님과 같은 사제임을 안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본당 신부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