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라는 질병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낯선 단어였다. 어쩔 수 없이 암과 마주하고 보니, 내 몸과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용량에 넘치는 짐을 싣고 브레이크 장치는 고장 난 채로 달리는 자동차처럼 앞만보고 질주한 자신이다.
작은 희생에 대해 누군가에게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자신만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는지, 얄팍한 자존심, 기복이 심한 감정, 게으름, 질투, 보이는 모습에 급급한 나, 거짓, 사치, 나눔에 인색한 자신, 지키지 못한 약속 등 먼지처럼 뿌옇게 쌓여있는 찌꺼기들이 퀭하게 나를 보고 있다. 여기저기 몸 구석구석에서 보살펴 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모른 척 지내온 나. 몸과 마음이 빚어낸 암이라는 친구를 직시해야만 한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안고 암 치료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의사를 찾고 수술과 항암 계획을 듣느라 분주하다. 또 한편으로는 전시를 열어놓고 보니 알리고 싶지 않은 아픈 소식을 광고하듯 많은 분이 이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도 빚이 많은데 이렇게 또 수도자들과 은인들의 엄청난 기도를 받는다. 언제 다 갚을는지 걱정스럽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백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초기 발견으로 복강경 수술을 했다. 마취로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묵주를 쥐고 주님 손을 꼬옥 잡으려 애쓴다.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올 즈음 가슴 졸이는 딸아이의 눈물 가득 고인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수술 자리는 아픈데 폐를 확장하기 위해 기구를 분다. 주렁주렁 달린 링거들과 아픔과 체념과 한숨이 범벅된 백색 공간. 44시간 동안 맞아야 하는 항암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몰아치는 병원 생활, 모두 까까머리를 하고 각자의 침상에서 아픔과 싸우고 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암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만이 나누는 체념 어린 눈빛이 오간다.
그렇게 시간은 느리게 지나간다. 12차례의 독한 항암 약은 잠시도 구토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쓰레기통을 껴안고 눈물, 콧물이 범벅되도록 쓰고도 노란 갱물을 개어 올리는 나에게 곁에 있는 환자가 커튼을 올리며 금방 뽑아낸 듯한 말랑한 쑥떡을 고소한 콩고물에 묻혀 한접시 살며시 건넨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때 이게 넘어갔다면서 드셔보시라고 권한다. 고맙게도 쑥떡이 넘어간다. 커튼 사이로 뭔가를 쓰고 있던 그녀. 그 고통 속에서도 성경을 필사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한다. 묵주를 쥐고 있는 나와 그녀는 나이도 비슷하여 금방 친구가 됐다.
아픔을 공유하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엮어주신 암 병동 동창생 박주원 젤뚜르다! 누구보다 나의 성화 작업을 응원하던 그녀인데 이제는 주님 곁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
“예수님은 바보인데 나는 너무 똑똑하고, 예수님은 낮은 곳에 나는 너무 높은 곳에, 예수님은 비움인데 나는 너무 채움이요.” 그녀와 오고 가던 카톡에서 보내준 글이다. 깊은 밤 가엾은 그녀 생각으로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뚜욱 뚝! 가시관에서 떨어진 피보다 진한 눈물. 지축이 흔들리듯 울리는 주님의 소리.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정미연 아기예수의데레사(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