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이십 년을 훌쩍 넘긴 나는, 일 년 혹은 이년에 한번 고향을 찾을 때마다 고난의 현장을 찾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저 그들 곁에 서기 위해서다. 사람은 곁의 사람들을 닮기 마련이다. 부유한 이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이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닮아갈 것이요, 힘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사람들은 힘 있는 이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닮아갈 것이다.
고난의 자리에 서서 폐허를 응시하는 사람들, 고난이 남긴 흉터와 모욕과 인간관계의 달고 쓰고 어여쁘고 못난 지리함을 다 겪으면서도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은 희망 없는 사랑의 역설적인 희망을 아는 사람들이다. 위선과 모순이 많고, 겁쟁이이며, 땅과 생명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죽어간 그리고 살아있는 많은 이들에게 도무지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사는 나는, 그 막막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 곁에 서서 그들을 닮고 싶을 뿐이다.
이번 고향 방문에서도 그들을 찾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바다에 묻은 후 9년을 견뎌 온 세월호 유족들을 다시 만났다. 잘 살아오셨다고, 살아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안전대책 미비와 책임 회피가 초래한 또 다른 참사로 푸른 삶을 마감한 이태원 영령들의 유족을 만났다. 보라색 리본을 단 이태원 유족들 곁에 노란색 리본을 단 세월호 유족들이 있었다. 이주민, 난민들을 응원하는 의정부교구의 국제청년 미사도 함께했다. 불안정한 고용과 노동착취, 인종차별을 겪으며 직업선택과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제한받고 있는 이웃들의 삶을 마음에 담았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기 원하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퀴어퍼레이드에서는, 가톨릭 부스를 찾아 주시는 분들께 무지개 리본을 달아 드렸다. 위로받는 당사자들과 앨라이(ally)들을 만나며 내가 더 큰 위로를 받았다. 제주 강정마을도 10년 만에 다시 찾았다. 사는 일이 바빠 잊고 있었던 그 작은 마을에, 구럼비 폭파되고, ‘관광미항’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 분열되는 그 시간들을 심장에 꽂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그들 곁에 서서 울먹일 수 있을 뿐이었다.
번쩍이던 카메라들이 사라지고, 관심과 위로조차 희미해지고, 오해와 절망만 남아있는 것 같은 이 무너진 길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 길가에 내쳐진 사람들 곁에 그들을 지키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웃의 상처를 보고 눈을 돌리지 못해 멈추어 섰다가 아예 그 자리에 남아버린 이들이다. 불어오는 칼바람을 버려진 이웃과 함께 맞으며 그 폐허를 지키고 있는 바보성자들이다. 이들을 참고 견디게 하는 힘이 무얼까? 이들은 어떻게 희망 없이도 사랑하는 법을 익혀버린 걸까? 바보성자들 곁에 있으면서 나와 같은 물음을 가졌던 신학자 정경일이 말했다. “은총 아닐까요?”
고난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은총이라던가.(시몬느 베이유)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은총은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이 나의 희망보다 더 오래 참고 견디며, 내 희망이 소진되더라도 사랑은 가실 줄 모른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모든 희망이 무너진 듯한 자리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엎어져 기다릴 때 그 마음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닿는다. 은총은 그렇게 내 희망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희망을 받아들이게 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당신의 뜻과 의지를 내려놓으셨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희망이다. 조건 없이 기대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희망이다. 부활로 이어지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