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줄지어 기다리던 내 차례가 되었다. 화사한 금발의 봉사자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맘속으로 여러 번 준비했던 질문을 할 시간이다. 용기를 내었다. “그런데, 할머닌 어느 교회에 다니시나요?”
할머니는 예쁜 미소를 띤 채, “나는 그저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따름이에요”라고 답했다. 나는 식겁하며 내 영어가 짧았음을 자책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편이기를 바랐던 게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던가! 쳇, 도도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그렇게 약간의 자존심이 구겨진 채 나의 호주 생활의 서막이 올랐다.
시드니 교외에 사는 나는 한인성당이 멀어 동네 체칠리아 호주 성당에 나간다. 한 달에 한 번 한국 미사를 해주시러 우리 구역에 오시는 신부님의 정성에 답답한 신앙의 체증이 쑥 내려간다. 미사 전례가 세계 공통이긴 하지만, 기도발은 역시 국산 말이…. 흐흐, 한국 송충이는 역시 국산 솔잎을 먹어야 하나 보다. 그날 체칠리아 성당의 ‘비니스 수집함’이 눈에 띄더니 그 가게와 까칠한 봉사자 할머니가 떠오른다.
‘비니스(Vinnies)’는 호주의 앤티크를 모조리 다 모아놓은 듯한 재미있고 유익한 중고가게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가톨릭 정신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호주 전국 규모의 자선 단체로, 동네 어귀마다 있다. 언젠가 호주 여행 중 에어비앤비에 머물다가 와인 잔을 깨뜨렸다. 비니스에 들려 단돈 2불에 멋진 와인 잔을 사놓으니 당혹스러움이 한결 덜했다. 참 착한 가게이다.
그런데 그런 득템 못지 않게 가게가 더 아름다운 것은 기증자들의 모습이다. 양손에 무거운 기증품을 힘겹게 든 아저씨가 구매자 줄에 서서 기부할 차례를 기다린다. 이름을 남긴다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은 채 물건을 풀고 미련 없이 떠난다. 그러는 그들의 뒷모습이 깔끔하고 존경스럽다.
후에 알게 된 비니스의 자원봉사자인 홍 여사는 놀랍게도 한국 장로교회 집사였다. 나는 2년간 함께 공부한 영어 선생의 종교를 여태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새벽 정원을 산책하고, 지렁이 농장을 살피고,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녀가 이민자와 난민 활동에 연대하며, 호주 원주민 처우 개선에 앞장선다는 것도.
이제야 ‘그저 하느님을 위해 일할 뿐’이라던 봉사자 할머니의 깊은 뜻이 와 닿는다. 진정한 종교는 편 가름이 아니라 상대편의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행위임을. 그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사업에 초대받은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이마리(마리아 앵죠) / 아동청소년소설가, 「캥거루 소녀」 외 다수의 역사소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