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 전 뜻밖에 제주도민이 되었다. 제주도의 삶은 여전히 좋다. 콩나물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 달음박질하지 않아도 되는 제주의 삶은 ‘좁아서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삶’이 가능하다. 초기 2~3년 동안은 서울에서 친구가 왔다고 하면 그곳이 멀지라도 퇴근 후 저녁 먹고도 거뜬히 다녀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못 한다. ‘30분 이상의 이동’을 특별한 일정으로 간주하는 ‘제주도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 도지사의 핵심 공약인 ‘15분 제주 도시’ 건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제주도민은 되었지만, 진짜 제주 말은 우리말이면서도 외국어보다 어렵다. 이주 10년 차이면서도 나는 아직 제주 말은 ‘기꽈?(그래요?)’ 정도밖에 할 줄 모른다. 듣기 실력은 많이 향상되었다고 자부하다가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자괴감에 빠져들고 만다.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며 살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소속 나오미센터다. 이주민과 난민 등의 외국인을 돕는 곳인데, 매주 영어 미사를, 매월 베트남어 미사와 동티모르어 미사를, 격월로 필리핀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내과와 산부인과 무료진료도 제공한다. 그리고 건강보험 가입 자격이 없는 외국인들을 위해 제주대학병원을 포함한 21개 병원과의 업무 협약을 통해 외국인의료공제회를 도입하여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삶을 지원하고 있다.
센터 내의 공부방에는 예멘, 수단, 인도, 베트남 등 다양한 나라에서 살다가 이주한 ‘이주배경 아이들’이 오는데, 국가의 다양성만큼이나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각양각색이라 늘 새롭고 재미있다. 공부방의 공통 언어는 물론 한국어이고, 공통 메뉴(?)는 치킨, 즉 닭고기다. 소고기나 돼지고기와는 달리 치킨을 금기시하는 국가나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롭게 추가되는 메뉴가 있다면 바로 ‘매운맛 컵라면’이다. 아이들은 집에서 출신국 음식을 먹고, 밖에서는 한국 음식을 먹으며 다양한 나라 음식을 즐길 줄 아는 ‘다문화’ 아동으로 성장해간다.
어느 날, 아직 한국말이 서툰 인도 출신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저 오늘 영어 시험 봤는데 세 문제 틀렸어요!”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공부방 지도 선생님이 영어가 주 언어인 인도 사람이 영어 시험을 세 개나 틀린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자, 아이가 큰 눈망울을 굴리며 불평한다. “왜 영어 시험을 한국어로 봐요?” 한국어로 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세 문제나 틀린 것이다. 옆에 있던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로 시험을 보는 거야~”하고 이야기했지만, 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더 좋은 점수를 받는 영어 시험 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난다. 이제는 어린이가 젓가락질을 못 하면 야단맞는 대신 포크를 손에 쥐여주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 음식을 먹는데 서양 음식 도구가 사용되는 것이다. 서양 음식 문화를 만나 새롭게 변화된 한국 음식 문화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듯이, 외국인 학생도 함께 어우러져 지낼 수 있는 교육환경을 기대해본다.
김상훈 / 안드레아 제주교구 이주사목(나오미)센터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