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법적 신분은 이주민 노동자다. 몇 년 전 영주권을 획득하기까지 나는 이민서류에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비자를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미등록 체류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혹자는 나를 ‘불법체류자’라 불렀을 것이다. 서류를 구비한 뒤로는 단속과 추방의 위협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시한과 기회를 놓쳐 서류를 갖추지 못한 채, ‘불법’적 존재가 되어 차별을 감내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권력과 거리가 먼 존재일수록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이문영, 「웅크린 말들」)
처지가 이러니, 한국의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이주민들의 모습을 눈여겨보게 된다. 엘리트, 전문가로 분류되는 외국인들의 경험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국뽕’ 콘셉트가 대세다. 아시아 이주민들은 이런 프로그램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살인자, 폭력조직의 하수인, 장기매매, 인신매매 중개인, 비굴한 용역노동자, 착하지만 자신의 권리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 무책임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국제결혼 여성, 늘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 여성 등으로 재현된다. 게다가 이들의 출몰은 정해진 공식을 따른다. 주인공 영웅에게 일망타진 당하고 넝마처럼 버려지든가, 아량 있는 선주민에게 용서를 받고 뉘우친 뒤 자신의 ‘주제’를 깨닫고 살아가든가. 선주민의 시각에 동화될 수 없는 나는 마음이 언짢아져 채널을 바꾼다.
유엔인종차별위원회에서 한국의 인종차별 상황이 이미 심각하며 국가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 5년 전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난민,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인종차별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한국의 인종차별은 유색인종은 괄시하면서 백인은 우월하게 보는 인종 서열화 양상을 띤다. 그 뿌리는 근현대 식민사와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인종주의, 정신적 식민화와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리고 그 차별을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기제는 법이다. 유색인종 이주민들 대부분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체류한다고 여기기에, 차별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차별은 당연하게 느껴질 때 가장 위험하다.
미등록 체류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주민은 없다. 등록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디어가 재현하는 것처럼 범죄와 연루돼서가 아니라, 불평등한 행정으로 이어지는 제도적인 인종차별 때문이다. 현행법상 이주노동자는 사용자의 귀책이 없으면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다. 즉, 폭행, 감금, 산재피해, 고강도 노동, 임금체불 등을 당해도 회사 측의 동의가 없으면 일터를 바꿀 수 없다. 설령 변경허가를 받더라도 같은 업종, 일정 권역 내에서만 이동이 가능하다. 이들은 살기 위해 사업장을 이탈하고, 그렇게 ‘불법’이 된다.
뿐이랴, 미등록 체류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들도 기본권과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2022년부터 체류자격 부여 대상을 넓혔지만, 이주가정에서는 정보에 대한 접근, 언어 등 여러 장벽 때문에 신청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아동에 대한 권리개선과 별도로 미등록 체류 부모는 출국조치가 된다. 한국의 인종차별은 이렇게 계급계층화 되어 대물림되고 있다. 인종을 중심으로 차별이 계급계층화 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교리서가 명시하는 교회의 가르침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35)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복음은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최소한으로 주어져야 하는 몫을 인정하는 것이며, 때로는 내 몫을 내어 놓는 것이며, 주어져야 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이들의 몫까지 되찾아 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생명이라는 이유 하나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 생명을 통해 하느님이 숨 쉬고 계시기 때문이다.